경영은 본질적으로 불확실성과의 사투다. 특히 M&A(인수합병)라는 거대한 자본의 이동 속에서 경영진은 수많은 이해관계자의 감시와 법적 리스크에 노출된다. 최근 삼성전자가 인수한 하만(Harman)이 미국 델라웨어주 대법원에서 거둔 승소는, 현대 경영에서 **임원배상책임보험(D&O Insurance)**이 단순한 비용을 넘어 전략적 방어 기제로서 어떤 위상을 갖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1. '범프업'의 함정과 법적 상식의 충돌
하만 사례의 핵심 쟁점은 **'범프업(Bump-up) 조항'**이었다. 보험사는 주주 집단소송의 합의금이 결국 '부족했던 인수 가격의 보충'이라고 주장하며 면책을 시도했다. 즉, 원래 주어야 했을 매각 대금을 보험금으로 때우려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법원은 이 합의금을 '인수 가격 조정'이 아닌 '소송 리스크 해소 비용'으로 규정했다.
이 판결은 경영진의 의사결정이 사후적으로 부정당할 때, 그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기업 자산이 아닌 보험 체계 내에서 흡수할 수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이는 경영진이 위축되지 않고 과감한 M&A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심리적, 재무적 안전판을 제도적으로 공인받은 것과 다름없다.
2. D&O 보험의 경제적 효능: 대리인 비용의 완화
D&O 보험은 자본주의의 고질적 병폐인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를 완화하는 경제적 도구다. 주주는 경영진이 공격적인 가치 창출을 하길 원하면서도, 동시에 그 과정에서의 과실은 엄격히 묻는다. 이 괴리 사이에서 경영진은 극도로 보수적인 '방어적 경영'에 빠지기 쉽다.
위험 전이(Risk Transfer): 소송 비용과 합의금 리스크를 제3자인 보험사로 이전함으로써 기업의 현금 흐름 변동성을 낮춘다.
우수 인재 확보: 법적 리스크가 높은 산업군에서 유능한 경영진을 영입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
신속한 분쟁 해결: 하만의 사례처럼 거액의 합의금이 담보될 때, 기업은 장기 소송에 따른 유무형의 손실을 끊어내고 본연의 사업에 집중할 수 있다.
3. 확장되는 전선: 글로벌 분쟁의 선례들
하만 사례 외에도 D&O 보험은 현대 기업 경영의 변곡점마다 등장해 왔다.
미국 테슬라(Tesla) 사례: 일론 머스크의 트위터 게시글(상장 폐지 언급)로 인한 주주 소송 당시, D&O 보험은 막대한 방어 비용과 합의금의 핵심 자원 역할을 했다.
국내 사례: 과거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분식회계 사태 당시 임원들에 대한 배상 책임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D&O 보험의 보상 범위와 고지 의무 위반 여부가 법적 쟁점이 된 바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D&O 보험이 이제 '선택'이 아닌 상장 기업의 '표준'임을 방증한다. 특히 하만 판결은 향후 M&A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저가 매각' 시비를 보험으로 방어하려는 기업들에게 매우 유리한 해석 기준을 제공했다.
4. 사유: 책임 경영과 보험의 공존
경영자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존재다. 그러나 그 책임이 개인이나 기업의 존립을 위협할 수준의 징벌적 소송으로 이어진다면 경영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하만이 확보한 400억 원의 보험금은 단순히 현금 유입의 의미를 넘어, **'정당한 경영 판단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은 시스템이 보호한다'**는 원칙의 승리다.
결국 D&O 보험은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를 방조하는 수단이 아니라,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 법적 리스크라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 돕는 방파제다. 하만 사례를 통해 기업들은 다시금 확인했을 것이다. 전략적인 보험 설계가 곧 전략적인 경영의 일부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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