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4일 화요일

그린워싱 규제, 주요국 규제 동향과 실제 제재 사례

그린워싱 규제, 이제는 전 지구적 '법적 전쟁'

"친환경", "에코", "탄소중립", "지속 가능한 소재." 오늘날 수많은 제품과 광고에 넘쳐나는 이 단어들이 과연 모두 진실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세계 각국의 규제당국이 증명하고 있다. 그린워싱(Greenwashing)은 이제 단순한 마케팅 과장의 문제가 아니다. 수백억 원대의 벌금, 광고 금지 처분, 형사 소추까지 이어지는 엄연한 법적 리스크가 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 영국의 경쟁시장청(CMA)이 그린 클레임에 대한 책임을 공급망 전체로 확대한 것은 이 흐름의 일단을 보여줄 뿐이다. EU, 미국, 호주, 싱가포르, 한국 등 주요국들이 이미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각국의 규제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며, 실제로 어떤 기업들이 어떤 방식으로 제재를 받았을까.


EU: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그린워싱 규제의 탄생

EU는 2023년 5월, 기업이 친환경 주장을 할 경우 반드시 검증 가능한 증거를 제시하도록 의무화한 '그린 클레임 지침(Green Claims Directive)'을 채택했다. 이 지침의 핵심은 '입증 책임의 역전'이다. 기업이 먼저 과학적 근거와 제3자 인증을 확보하지 않으면 "친환경"이라는 표현 자체를 사용할 수 없다. '친환경', '기후 중립', '지속 가능' 등 일반적인 표현은 명확한 근거 없이는 사용이 금지되며, 위반 시 연 매출의 최대 4~16%에 달하는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나아가 친환경 주장을 하는 기업은 전과정평가(LCA, Life Cycle Assessment)를 통해 이를 입증해야 하며, EU 역외 기업도 동일한 규제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한국 기업들이 결코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제재 사례도 나왔다. 이탈리아 법원은 패스트패션 브랜드 쉐인(Shein)의 유럽 법인에 그린워싱을 이유로 100만 유로의 벌금을 부과했다. 당국은 지속가능성 관련 홍보 내용이 모호하고 일반적이며 일부 경우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허위였다고 판단했으며, 2023년과 2024년에 오히려 실제 탄소 배출량이 증가했음에도 감축 목표를 홍보한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금융권도 예외가 없었다. 도이치뱅크의 자산운용 부문인 DWS는 ESG 자격 기준을 투자자에게 허위로 알린 혐의로 독일 검찰로부터 2,500만 유로의 벌금을 부과받았으며, 이는 미국 SEC의 유사한 제재에 이은 조치였다.


미국: 규제기관과 법원 모두가 움직인다

미국의 그린워싱 규제는 연방거래위원회(FTC)의 '그린 가이드(Green Guides)'를 축으로 작동한다. 2012년 이후 개정되지 않았던 그린 가이드는 2023년 재검토 작업에 들어갔으며, 7,000여 건에 달하는 의견을 수렴하는 등 업데이트를 추진해 왔다.

SEC 역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미국 SEC는 글로벌 자산운용사가 ESG 관련 투자에 대해 잘못된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1,750만 달러의 민사 벌금을 부과했다. 해당 운용사는 2020년부터 2022년까지 마케팅 자료에서 자사 자산의 70~94%가 'ESG 통합' 자산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ESG 요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패시브 ETF 자산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비재 분야에서는 월마트가 대표적인 제재 사례로 꼽힌다. 월마트는 합성 레이온으로 만든 제품을 친환경 대나무로 제작했다는 허위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300만 달러(약 41억 원)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패션업계에서는 H&M이 여러 건의 소송에 시달렸다. 미국 법원에서 일부 소송은 기각되었지만, 집합적으로 보면 H&M은 미국에서 그린워싱 관련 합의금으로 300만 달러를 지급했다. 특히 H&M의 'Conscious Choice' 컬렉션이 지속가능한 소재 사용 비율을 부풀렸다는 의혹이 소송의 핵심이었다.


호주: 위반 시 최대 5,000만 호주달러 벌금

호주는 그린워싱 제재 수위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 중 하나다. 호주 경쟁소비자위원회(ACCC)는 '그린워싱 방지를 위한 환경성 주장' 최종 지침을 발표하며 그린워싱 단속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위반 시에는 5,000만 호주달러(약 450억 원) 또는 위반으로 얻은 이익의 3배에 달하는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실제 사례도 등장했다. 호주의 한 기업은 해양 플라스틱을 50% 사용했다고 광고했으나 실제로는 해안가 인근 플라스틱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나 825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이는 "어디서 온 플라스틱인가"라는 세부 사항까지 광고가 정직해야 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영국: 광고 금지부터 매출의 10%까지

영국의 광고표준국(ASA)은 그간 그린워싱 광고에 대해 가장 적극적인 행정 제재 기관으로 활동해왔다. 영국의 Shell,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 스페인의 정유사 렙솔의 광고가 ASA에 의해 광고 금지 처분을 받았다. 렙솔의 경우, 아직 재생가능 수소를 실제로 생산하지 않는 상황임에도 이를 주력인 것처럼 홍보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자동차 업계에서도 제재가 이어졌다.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이 하이브리드 차량에 대해 '무배출(zero emissions)'이라고 광고했으나, ASA는 전기 모터로 주행하지 않을 때에도 배기가스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동일 광고의 반복을 금지하는 시정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2025년부터는 차원이 달라졌다. 영국은 디지털시장·경쟁·소비자법(DMCC)에 따라 2025년 4월부터 그린워싱에 대해 글로벌 연간 매출의 최대 10%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CMA는 2025년 가을부터 그린 클레임 코드(GCC)에 대한 대규모 공개 집행에 나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는 규제기관이 지침 제시에서 실제 행동으로 전환하는 전환점을 의미한다.


싱가포르와 캐나다: 금융과 제도 측면에서의 접근

싱가포르는 금융 분야 그린워싱 규제에 특히 집중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일본, 홍콩, EU 등과 함께 ESG 평가 규제 표준을 도입하는 국제적 흐름에 동참하고 있으며, ESG 평가의 품질 보증과 방법론의 투명성 확보를 핵심 원칙으로 삼고 있다. 자산운용 및 녹색 금융 허브를 지향하는 싱가포르로서는 ESG 신뢰성이 국가 금융 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캐나다는 입법을 통한 접근법을 택했다. 캐나다는 2024년 경쟁법을 개정해 허위 마케팅 조항에 반그린워싱 조항을 포함시키고, '환경 청구 지침서'를 발행했다. 이는 그린워싱을 소비자 기만 행위의 하나로 명확히 규정하고 처벌 근거를 법률 차원에서 확고히 다진 조치다.


한국: 규제 기반은 갖춰졌지만, 실효성 강화가 과제

한국도 그린워싱 규제 체계를 갖추는 중이다. 국내 그린워싱 관련 규제는 환경부 소관의 환경기술산업법과 공정거래위원회 소관의 표시광고법에 의해 이원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규제당국들은 기존 법들을 개정하고 가이드라인을 발간하는 등 점차 그린워싱에 특화된 규제체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실제 적발 건수도 가파르게 늘었다. 환경부에 따르면 국내 그린워싱 적발 건수는 2021년 272건에서 2023년 4,940건으로 3년 새 약 18배 증가했다. 2024년에는 자라(ZARA), 스파오, 탑텐 등 패션 기업들이 '에코·지속가능' 표기의 근거 부족을 이유로 공정위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EU, 미국, 호주와 달리 한국은 실제 규제 위반 발생 시 행정지도 또는 시정 명령 등의 처분을 받은 것이 대부분으로, 제재 수위가 상대적으로 낮다. 2024년 국정감사에서도 모호한 그린워싱 판단 기준과 미약한 처벌 수위가 지적되었으며, 향후 규제당국이 보다 구체적인 기준과 강화된 제재 수위를 갖출 것으로 전망된다.


'평판 리스크'에서 '법적 리스크'로

이제 그린워싱은 단순한 소비자 비판이나 SNS 여론의 문제가 아니다. 초기에는 소비자 및 환경단체의 움직임에 기초하여 기업들에게 '평판 리스크', '시장 리스크'를 가져다 주었던 그린워싱은, 관련 법규제 도입 및 규제기관의 적극적 개입에 힘입어 '법적 리스크(Legal Risk)'로 심화되고 있는 추세다.

그린워싱 관련 글로벌 기후소송 건수는 2022년 기준 2017년보다 약 2배 이상 늘어났으며, 예전에는 전통적인 화석연료 기업 위주였던 소송 대상이 이제는 금융기관 및 소비재 기업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결국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이라면, 공급망의 어느 단계에 있든 가장 엄격한 기준을 기준점으로 삼는 수밖에 없다. 친환경 주장을 하려면 제3자 검증을 확보하고, 전 생애주기(LCA)에 걸친 데이터를 갖추며, 모호한 표현보다 측정 가능한 수치로 소비자에게 정직하게 전달해야 한다. 그것이 규제를 피하는 최선인 동시에, 진짜 지속가능한 경영을 향한 첫걸음이다.


소방관들의 용기를 보호하는 시스템을 마련하라



소방관 순직, 이대로 둘 수 없다 — 용기와 만용 사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

2026년 4월 12일, 일요일 아침. 전남 완도의 한 수산물 냉동창고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신고를 받은 선착대는 오전 8시 31분 현장에 도착해 화재 진압을 시작했고, 대원 7명이 창고 내부로 진입해 고립된 관계자들을 구조하고 화재를 진압했다. 1차 진압은 일단 성공이었다. 그런데 오전 8시 45분경 공장 내부에서 연기가 다시 보이자, 1차로 진입했던 대원 7명이 화재를 마저 진화하기 위해 다시 내부로 들어갔다. 10분 뒤, 천장에 고여있던 유증기가 폭발하며 불길이 급속도로 확산됐다.

화염 분출 직후 무전으로 대피 지시가 떨어졌지만, 19년 차 베테랑 박 소방위와 젊은 노 소방사는 출입구를 각기 5m, 3m 앞두고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세 아이의 아버지와, 10월 결혼식을 앞두고 있던 예비 신랑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이 죽음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그들의 헌신에 박수를 보내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애도하되, 동시에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왜 이 일이 반복되는지,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첫 번째 질문 — 무리한 투입은 없었나

최근 10년간 위험직무 수행 중 순직한 소방관은 40명을 넘어섰으며, 그 중 화재진압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 숫자가 매년 줄지 않는다는 사실은, 단순히 화재 현장이 위험하기 때문만은 아닐 수 있다.

이번 완도 사고를 다시 들여다보면 불편한 의문이 떠오른다. 당국은 에폭시와 우레탄 작업 과정에서 발생한 유증기 폭발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내부는 가연성 우레탄 폼과 에폭시 재질로 가득 찬 밀폐 구조였다. 한 번의 진압을 마치고 나왔음에도, 연기가 다시 보이자 동일한 대원들이 곧바로 2차 진입을 결행했다. 내부에 유증기가 축적되어 있을 가능성, 플래시오버의 가능성을 충분히 점검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베테랑'이라는 수식어는 양날의 검이다. 소방공무원 노조 관계자는 인명 수색이나 구조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큰 불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무리하게 대원들을 투입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베테랑일수록 수많은 화재 현장을 살아서 나온 경험이 축적되고, 그 경험이 때로는 과신으로 이어진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어'라는 심리는 용기가 아니라 위험의 씨앗일 수 있다. 살아 돌아온 것과 항상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명제다.

물론 이것을 개인의 무모함으로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그 이면에는 만성적인 인력 부족, 무조건 투입을 당연시하는 조직 문화, 현장의 위험을 충분히 평가하기 어렵게 만드는 열악한 장비와 정보 체계가 구조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소방관 개인이 돌아서기 어렵게 만드는 환경이 문제의 근원이다.

두 번째 질문 — 안전 진화 매뉴얼은 작동했나

한국에도 재난현장 표준작전절차(SOP)는 존재한다. 이 절차에 따르면 전술적 우선순위는 대원 안전, 인명 구조, 재산 보호, 재난 안정화 순서로 규정되어 있다. 서류상으로는 대원의 안전이 가장 먼저다.

그러나 현장은 서류가 아니다. 문제는 그 매뉴얼이 실제로 작동하느냐이다. 완도 냉동창고는 소방시설 설치 의무 대상이 아니어서 스프링클러도 없었다. 진입 전 건물 내부 구조나 가연성 물질의 분포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확보했는지도 불분명하다. 실전 같은 훈련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오랫동안 제기돼 왔다. 국내에 실물 화재 훈련장이 많지 않고, 있는 훈련장에서도 인근 주민 민원 때문에 실제로 불을 피워 훈련하기 어렵다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2024년 문경 화재 당시에도 공장 내부에 이미 모두 대피해 구조 대상자가 없었지만, 소방관들에게 그 정보가 정확히 전달되지 않아 내부 진입에 나섰다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정보 공유 체계의 부재가 생사를 가른 셈이다. 매뉴얼이 있다는 것과 매뉴얼이 현장에서 실제로 지켜진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지휘관이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투입 여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하지만, 현장 근무자보다 행정 근무자가 승진에 유리한 구조 탓에 현장 지휘 능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여전히 나오고 있다.

세 번째 질문 — 소방 선진국은 어떻게 하고 있나

미국에서는 1998년 OSHA가 'Two-in/Two-out' 원칙을 명문화했다. 이는 실내 구조화재에 내부 2명, 외부 2명을 배치하는 최소 안전 원칙으로, 내부팀은 상호 시야와 음성 접촉을 유지하고 외부팀은 감독·구조 준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더 나아가 미국화재예방협회(NFPA)는 NFPA 1407을 통해 신속개입대(RIC)의 운용과 훈련 기준을 정립했으며, 2020년 판에서는 이를 최소 지휘관 1명과 대원 3명으로 구성되어 IDLH(생명 위협 환경) 외부에 대기하는 전담 구조팀으로 공식 정의했다. 즉, 내부에 대원이 진입할 때 반드시 외부에 구조 전담팀이 대기하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동료를 구하러 다시 들어가는 것이 개인의 용기에 맡겨진 일이 아니라, 준비된 팀이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임무라는 뜻이다.

한국도 2023년 이후 신속동료구조팀(RIT) 편성과 운영 근거를 행정규정에 마련하고 교육 확산에 나서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제도를 만드는 것과 그것이 모든 현장에서 실제로 운용되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큰 간극이 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소방 선진국들은 공통적으로 '공격적 내부 진입(offensive interior attack)'을 기본으로 하되, 건물 붕괴 위험, 폭발성 물질, 가시성 저하 등의 조건에서는 방어적 진압으로 전환하는 명확한 기준을 갖추고 있다. 누군가 한 명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설정된 기준에 따라 대응 전략이 자동으로 전환된다.

결론 — 용기를 보호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소방관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그 용기는 보호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현실은 그 용기를 제도가 뒷받침하지 못한 채, 개인의 헌신에 의지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순직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국가는 훈장을 수여하고, 국립현충원 안장을 약속하고, 애도의 메시지를 남긴다. 그리고 얼마 후 또 다른 이름이 그 자리에 오른다.

진짜 예우는 훈장 이전에 있다. 진입 전 충분한 정보 파악, 현장 상황에 맞는 진입 여부 판단 기준의 명확화, 가연성 물질이 가득한 밀폐 공간에 대한 특별 진입 규정, 실전적인 훈련 환경의 확보, 그리고 지휘관이 '안 들어가겠다'고 판단할 수 있는 문화. 이 모든 것이 갖춰질 때, 비로소 우리는 소방관을 존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용기 있게 불 속으로 달려가는 동안, 우리는 제도라는 방화복을 입혀주고 있어야 한다.


2026년 4월 12일 일요일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서 경영자에게 던지는 질문


호르무즈 봉쇄 "병목의 시대를 항해하는 경영자에게"  


2026년 2월 28일, 세계는 잠에서 깨어나 뉴스 속보 하나와 마주쳤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선전포고 없이 이란을 선제 타격했고, 이란은 즉각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그 순간부터 지구 위 수십억 명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오디세우스와 동일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한쪽에는 여섯 개의 머리로 지나가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괴물 스킬라가 있고, 반대쪽에는 하루에도 세 번씩 바다 전체를 빨아들이는 소용돌이 카리브디스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어느 쪽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배를 몰아야 했다. 오늘날 글로벌 공급망에 연결된 기업의 경영자들도 정확히 그 좁은 해협을 통과하고 있다.


호르무즈, 그 좁은 목구멍이 세계를 멈추다

호르무즈 해협은 폭이 가장 좁은 곳에서 불과 33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그러나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이 해협을 통과하는 석유는 하루 평균 약 2000만 배럴로, 전 세계 해상 거래 석유의 25%에 달한다. 단순히 석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호르무즈 해협은 화학물질과 헬륨, 금속, 비료 등의 운송 통로이기도 하다. 컨테이너 물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평소 페르시아 만 내부의 컨테이너 물동량은 65만 TEU로 글로벌 물동량의 3.3%에 불과하지만,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컨테이너 노선의 선복량을 합치면 전 세계 컨테이너선의 약 10%에 해당하는 330만 TEU라는 엄청난 물량이 된다.

이 좁은 해협이 막힌 순간, 세계 경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속도로 충격을 받기 시작했다.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고 주식 가격은 하락했으며, 안전 자산으로의 도피에 따라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채권 가격도 인플레이션 우려로 하락 압력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 증시인 코스피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 여파로 급락하여 매도 사이드카가 발동되었다.


스킬라 — 봉쇄를 우회하면 만나는 괴물

고대 신화에서 스킬라는 암벽 위에 숨어 있다. 가까이 가지 않으면 될 것 같지만, 카리브디스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쪽 해안을 지나쳐야만 한다. 호르무즈 봉쇄 앞에서 기업들이 가장 먼저 택한 선택지, '우회로 찾기'가 바로 이 스킬라다.

페르시아 만 인근 국가로 향하는 화물선들은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자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인근 UAE의 푸자이라항, 스리랑카의 콜롬보 등지에 화물을 하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동으로 향할 엄청난 화물이 제한적인 대체 항구로 밀려들면서 이미 대체 항구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으며, S&P 글로벌 관계자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풀리더라도 이들 대체 항구에 선박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입항할 경우 재앙적인 혼잡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회로 자체가 또 다른 병목이 되어버린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원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대체 수입선을 찾고, 물류 경로를 바꾸고, 계약 조건을 재협상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선택은 비용의 급격한 증가를 동반한다. 글로벌 해운이 혼란에 빠지면서 주요 물류 기업들이 서아시아 항로를 취소했고, 운송비와 보험료가 상승하고 지연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 비용은 결국 소비자에게 전가될 것이다. 스킬라의 여섯 개 머리는 바로 이 여섯 가지 비용 — 물류비, 보험료, 재고 비용, 계약 위약금, 원자재 가격 프리미엄, 납기 지연에 따른 고객 이탈 — 이다. 어느 하나를 피하려 하면 다른 하나가 배를 덮친다.


카리브디스 —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만나는 소용돌이

오디세우스가 스킬라를 피해 반대쪽으로 방향을 틀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카리브디스다. 하루에 세 번, 바다 전체를 거대한 소용돌이로 빨아들이는 이 괴물 앞에서는 배 전체가 사라진다. 경영 리스크로 번역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현상 유지를 택하는 것'이 바로 카리브디스다.

JP모건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 시 국제유가가 배럴당 120~130달러까지 급등할 수 있다고 전망했으며, 이는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수준에 해당한다. 한국의 경우 원유 수입량의 70% 이상이 중동에 의존하고 있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중동산 원유의 99%가 차단될 경우 경제 전반에 극심한 타격이 불가피하다.

특히 제조업 기반 기업들에게 '버티기'는 더 이상 전략이 아니다. 황 가격은 이미 25% 상승했으며, 이는 현대 산업의 가장 중요한 투입 요소 중 하나를 압박하고 있다. 황산은 구리 채굴, 배터리 소재 가공,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화학물질이다. 농업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전 세계 해상 비료 공급의 약 3분의 1이 이 해협을 통과하며, 요소의 경우 세계 교역량의 최대 43%가 이 지역에서 공급되었다. 현재 서방에서는 봄 파종기가 시작됐지만 요소는 급격히 부족해졌다.

가만히 있으면 카리브디스의 소용돌이가 기업의 원가 구조 전체를 빨아들인다. 수익성이 먼저 무너지고, 그다음에는 현금 흐름이, 마지막으로 기업 자체가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진다.


이것이 구조적 위기인 이유 — 신화는 반복된다

오디세우스가 겪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의 항해가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났다면, 우리는 그것을 불운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직면한 것은 반복되는 신화다.

산업연구원은 2022년 노르트스트림 가스관 폭파, 2023년 후티의 홍해 선박 공격, 2026년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등 일련의 사태를 일회성의 위기가 아닌, 비가역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국면으로 진단했다. 자폭 드론 등 저비용 공격 기술만으로도 고가의 방어 체계를 무력화할 수 있게 되면서, 국가 간 전면전 없이도 글로벌 물류 요충지가 마비되는 사태가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진단은 경영자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요구한다. 지금의 위기를 예외적 사건으로 처리하고 싶은 충동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신화 속 선원들이 괴물을 보지 못한 척 항해를 계속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란이 통행료 부과 및 선별적 봉쇄 구조를 영구적인 제도로 굳히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상황에서, 단순한 현상 유지는 에너지 안보 리스크를 해소하지 못한 채 전략적 공백만을 남길 수 있다.


오디세우스의 선택 — 경영자가 배워야 할 것

그렇다면 오디세우스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그는 두 괴물 중 '덜 치명적인 것'을 선택했다. 카리브디스 앞에서는 배 전체가 사라지지만, 스킬라 앞에서는 선원 몇 명을 잃더라도 배는 살아남는다. 오디세우스는 가슴이 무너지는 결정을 내렸다. 선원들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스킬라 쪽으로 뱃머리를 돌렸고, 여섯 명의 선원을 잃으면서도 나머지를 살려냈다.

이것을 경영의 언어로 번역하면 세 가지 전략이 된다.

첫째, 공급망의 분산(De-risking)이다. 단일 경로에 의존하는 공급망은 카리브디스다. IMEC(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은 인도와 중동, 유럽의 철도와 항구 등 인프라를 연결하는 구상으로, 미국·인도·EU·사우디아라비아·UAE 등이 참여하는 새로운 물류 경로로 주목받고 있다. 기업들은 이러한 대안적 공급망 구축에 지금부터 투자해야 한다. 위기가 터진 뒤 대안을 찾는 것은 소용돌이에 빠진 후 노를 찾는 것과 같다.

둘째, 재고 전략의 재설계(Buffer Stock)다. 린(Lean) 생산 방식은 평화 시절의 공급망에 최적화된 전략이다. 호르무즈 봉쇄와 같은 충격 앞에서는 전략적 재고 확보가 기업의 생존 버퍼가 된다. 비용이 발생하더라도 이 비용은 스킬라의 여섯 머리 중 하나를 내어주는 것이다. 배 전체를 잃지 않기 위한 선택이다.

셋째, 시나리오 경영(Scenario Planning)의 제도화다. 전문가들은 현재 상황을 현상 유지(60%), 부분 봉쇄(30%), 완전 봉쇄(10%)의 세 가지 시나리오로 구분하여 분석하고 있다. 경영자도 이처럼 시나리오별 대응 매뉴얼을 미리 준비해두어야 한다. 신화 속 오디세우스가 키르케 여신에게서 스킬라와 카리브디스에 대한 정보를 미리 얻어두었듯이, 사전 정보와 사전 계획이 생사를 가른다.


마치며 — 병목의 시대를 항해하는 경영자에게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를 통과한 그 해협의 이름은 메시나 해협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2026년의 경영자들에게 그 해협의 이름은 호르무즈다.

산업연구원은 향후 10~15년을 우리 산업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첩형 전환기'로 규정하며, 이번 미국·이란 전쟁을 단기적 손실로 단정하기보다 향후 산업 전환 전략을 설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디세우스가 결국 이타카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괴물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미리 대비했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이지 않았다. 스킬라냐 카리브디스냐의 선택 앞에서 경영자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다. 배는 이미 해협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배는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가.


이 글은 2026년 4월 현재 진행 중인 미국-이란 분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 상황을 바탕으로 경영 리스크 관점에서 분석한 칼럼입니다.


2026년 4월 10일 금요일

모건 하우절 《불변의 법칙》으로 읽는 리스크 관리의 본질

 

변하지 않는 것들이 리스크를 만든다

— 모건 하우절 《불변의 법칙》으로 읽는 리스크 관리의 본질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예측하려 애쓴다. 금리는 언제 내릴까, AI는 어떤 산업을 무너뜨릴까, 다음 위기는 어디서 시작될까. 그런데 《돈의 심리학》으로 전 세계 독자를 사로잡은 모건 하우절은 신작 《불변의 법칙(Same as Ever)》에서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은 계속 바뀌지만, 인간의 본성과 행동 패턴은 수천 년 동안 놀랍도록 일정하게 반복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불변의 패턴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큰 리스크의 원천이 된다. 하우절은 이 책에서 23가지 이야기를 통해 그 패턴들을 하나씩 해부한다.

■ 리스크는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온다

하우절이 책에서 가장 먼저 강조하는 통찰은 간결하지만 불편하다. 진짜 위험은 항상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는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2020년 팬데믹을 모델링한 기관도 실제 규모와 파급력을 맞추지 못했다. 하우절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리스크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위험이 아니라, 아무도 논의하지 않는 위험에서 온다고.

이것이 리스크 관리의 첫 번째 역설이다. 우리가 준비하는 위험은 이미 시장 가격에 반영되어 있다. 진짜 충격은 우리의 상상 밖에서 온다. 그렇다면 리스크 관리란 결국 무엇인가. 특정 위기를 예측하는 능력이 아니라, 어떤 충격이 와도 버틸 수 있는 구조적 여유를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이다. 하우절이 "룸(room)"이라고 부르는 이 여유가, 예측 모델보다 훨씬 강력한 방어막이 된다.

■ 과신: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위험한 불변의 법칙

인간의 과신(overconfidence)은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은 가장 위험한 특성 중 하나다.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투자자들은 자신의 판단을 지나치게 신뢰하며, 기업들은 새로운 프로젝트의 비용과 완료 시간을 체계적으로 과소평가한다. 이 패턴은 고대 로마에서도, 17세기 튤립 버블에서도, 2021년 밈 주식 열풍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리스크 관리의 관점에서 이 통찰은 매우 실용적인 함의를 가진다. 우리가 가장 확신하는 순간이 종종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포트폴리오를 지나치게 한 자산에 집중시키거나, 레버리지를 과도하게 사용하거나, "이번에는 다르다"고 믿을 때가 바로 과신이 극에 달한 시점이다. 하우절은 이를 단순한 심리적 결함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일부이며, 따라서 언제나 반복될 수밖에 없는 불변의 패턴이다.

■ 23가지 통찰이 수렴하는 하나의 진리

하우절이 책에서 펼쳐내는 23가지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주제를 다루지만, 결국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야기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에의 반응이 만들어내는 패턴들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몇 가지 통찰은 리스크 관리와 특히 깊이 맞닿아 있다.

첫째, 꼬리가 세상을 움직인다. 역사적 수익률의 대부분은 극소수의 매우 드문 사건에서 온다. 아마존의 성공, 애플의 아이폰, 2009년 이후의 장기 강세장—이 "꼬리 사건"들이 평균을 만든다. 리스크 관리는 이 꼬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올 때까지 게임에 남아 있는 것이다.

둘째, 과거는 미래의 안내서가 아니다. 인간은 경험에서 배우지만, 경험은 항상 과거의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위험은 과거 데이터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백테스팅이 완벽해도 미래는 다르게 펼쳐진다. 이것이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역사만 믿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셋째, 행복의 기준선은 항상 올라간다. 기대치는 결과보다 빠르게 상승한다. 이는 개인의 심리뿐 아니라 기업과 시장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실적이 좋아도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이 된다. 리스크는 절대적인 숫자가 아니라, 기대와 현실의 괴리에서 발생한다. 시장의 공황은 종종 나쁜 결과가 아니라 기대했던 것보다 나쁜 결과에서 시작된다.

넷째, 이야기의 힘은 숫자보다 강하다. 시장은 데이터가 아니라 내러티브에 의해 움직인다. 같은 경제 지표도 어떤 이야기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시장의 반응이 완전히 달라진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퍼질 때 군중이 형성되고, 군중이 형성될 때 리스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쌓인다. 버블은 항상 좋은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다섯째, 인센티브가 사고를 왜곡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센티브에 유리한 방향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부동산 중개인은 항상 "지금이 살 때"라고 말하고, 펀드매니저는 자신의 전략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리스크를 평가할 때, 조언자의 인센티브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여섯째, 복리는 직관에 반한다. 인간의 뇌는 지수적 성장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장기 투자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이고, 작은 비용이나 수수료가 장기적으로 막대한 리스크가 되는 이유다. 복리는 자산에도, 부채에도, 실수에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 살아남을 여유를 확보하라

하우절의 통찰들을 리스크 관리에 연결했을 때 도달하는 결론은 놀랍도록 단순하다. 불확실성은 제거할 수 없다. 그러나 불확실성이 치명적으로 작용하지 못하도록 구조를 만들 수는 있다.

그는 이를 "충분한 여유(enough room to err)"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예측이 틀렸을 때도, 타이밍이 어긋났을 때도, 생각지 못한 충격이 왔을 때도 게임을 계속할 수 있는 재정적, 심리적 여유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현금을 많이 보유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레버리지를 줄이고, 단기적인 손실을 강요받지 않는 구조를 만들며, 자신의 심리적 한계를 솔직하게 인식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

시장이 급락할 때 패닉에 빠져 팔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계획이 특별히 좋은 사람이 아니다. 팔지 않아도 되는 구조를 미리 만들어 놓은 사람이다. 이것이 하우절이 말하는 "이 게임은 살아남는 자들의 것"이라는 문장의 진짜 의미다.

■ 변하지 않는 것에 투자하라

하우절이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려는 에너지를 줄이고, 변하지 않는 것들—인간의 탐욕과 공포, 과신의 패턴, 이야기에 반응하는 본능, 기대치의 끊임없는 상승—을 깊이 이해하는 데 투자하라.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리스크 관리는 어떤 예측 모델보다 강력하다.

결국 좋은 투자자와 그렇지 않은 투자자의 차이는 미래를 더 잘 예측하는 능력에 있지 않다.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그에 맞게 자신의 행동 패턴과 포트폴리오 구조를 설계했느냐에 달려 있다.

《불변의 법칙》은 바로 그 설계를 위한 지도다. 그리고 그 지도가 안내하는 목적지는 화려한 수익률이 아니라, 어떤 폭풍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자리—게임에서 퇴장당하지 않는 자리—다.


공급망 인권, 기업이 몰라서 당하는 리스크 4가지

"우리 직원 잘 대우하면 그만 아닌가요?" — ESG 시대, 기업이 알아야 할 인권 리스크의 4가지 얼굴

얼마 전 세계 최대 전기차 제조사 중 하나인 BYD가 브라질에서 '강제노동' 기업으로 낙인찍히며 국영 은행 대출이 전면 차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많은 경영자들이 이 뉴스를 접하고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직원들한테 잘 하고 있으니 괜찮겠지."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오늘날 ESG 경영에서 '사람 리스크'는 내 회사 직원을 잘 대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가 되었다. 기업이 반드시 이해해야 할 인권 리스크의 네 가지 층위를 하나씩 짚어보자.

첫 번째 층위: 인권실사 — 모든 관리의 출발점

인권실사(Human Rights Due Diligence)는 특정 사건이나 피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기업이 자신의 사업 활동 전반과 공급망에서 인권 침해가 발생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문제를 발견하면 이를 방지하거나 완화하고, 그 과정을 외부에 투명하게 공시하는 일련의 절차 자체를 뜻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 회사가 인권을 지키고 있다'는 주장을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조사하고 증명하라는 것이다. 유럽연합은 이를 법으로 강제하는 공급망 실사 지침(CSDDD)을 이미 입법화했다. EU 시장에 접근하고 싶은 기업이라면 자사 공급망 전체에 대한 인권 실사 보고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하며, 이를 이행하지 못하면 수출 제한이나 거액의 과징금이 따른다. 인권실사는 선한 의도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시장 접근 자격의 문제가 된 것이다.

두 번째 층위: 강제노동·아동노동 — 공급망 전체를 뒤흔드는 결격 사유

네 가지 리스크 중 가장 파괴력이 크고 즉각적인 제재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강제노동과 아동노동이다. 강제노동이라고 하면 흔히 물리적 감금이나 폭력을 떠올리지만, 국제노동기구(ILO)의 정의는 훨씬 넓다. 채무로 노동자를 옭아매거나, 현실적으로 퇴직이 불가능한 구조적 압박을 가하거나, 신분증을 압수하는 행위 모두 강제노동의 범주에 들어간다. BYD의 브라질 협력공장에서 포착된 것도 바로 이 회색지대의 관행들이었다.

아동노동 역시 마찬가지다. 법적 근로 가능 연령 미만의 아동을 고용해 교육 기회를 박탈하는 행위는 국제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제재를 불러오는 인권 침해 중 하나다. 코코아, 코발트, 면화 등 특정 원자재 산업에서는 아직도 이 문제가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그 원자재를 사용하는 최종 제품 기업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핵심은 '직접 고용 여부'가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회사가 직접 고용하지 않은 3차, 4차 협력업체에서 강제노동이 발견되더라도, 그 부품이나 원자재가 우리 제품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도 동일한 책임을 지게 된다. 미국의 위구르 강제노동 방지법(UFLPA)은 이 논리를 법으로 구현한 대표적인 사례다.

세 번째 층위: 소셜 워싱 — 착한 척의 대가

환경 분야에 그린워싱이 있다면, 인권·고용 분야에는 소셜 워싱(Social Washing)이 있다. 실제로는 열악한 노동 환경을 방치하거나 차별적인 고용 관행을 유지하면서, 겉으로는 '여성이 일하기 좋은 기업', '인권 존중 경영'을 내세우는 기만 행위다.

소셜 워싱이 무서운 이유는 그 피해가 단순한 이미지 손상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ESG 정보를 허위로 공시한 것이 드러나면 소비자 불매운동은 물론, 허위 공시를 믿고 투자한 기관 투자자들로부터 손해배상 소송을 당할 수 있다. 최근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이 기업의 ESG 보고서를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장 데이터와 교차 검증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착한 척'의 비용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네 번째 층위: 노동 관행 리스크 — 가장 가까이 있는 위험

앞서 소개한 세 가지 리스크가 공급망과 대외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것이라면, 노동 관행 리스크는 기업 내부에서 매일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산업 현장의 안전사고와 직결되는 중대재해처벌법 리스크, 채용과 승진 과정에서의 성별·인종·종교 차별, 노동조합 설립을 방해하는 행위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이 리스크는 상대적으로 가시적이고 관리 가능한 영역처럼 보이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국내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이후 경영자 형사 처벌 사례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으며, 직장 내 괴롭힘이나 성차별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산될 경우 기업 이미지와 채용 경쟁력에 즉각적인 타격을 입힌다.

결론: 나사 하나까지 책임져야 하는 시대

네 가지 층위를 통틀어 보면 하나의 공통된 흐름이 보인다. 기업의 책임 범위가 눈에 보이는 울타리 안에서 공급망 전체, 나아가 원자재 산지까지 끝없이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기업은 '우리 직원에게 월급을 제때 주는 것'을 넘어, 우리 제품에 들어가는 부품 하나를 만드는 해외 하청업체 노동자가 강제로 일하고 있지는 않은지까지 직접 조사하고 증명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BYD의 브라질 사태는 이 현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최근의 사례다. 그 교훈은 단순하다. 공급망 인권 경영은 착한 기업이 되기 위한 선택 사항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계속 사업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공급망 어딘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강제노동 한 줄이 날린 것들 — BYD 브라질 금융 제재 전말

BYD 브라질 강제노동 사태: 공급망 인권 경영, 이제는 생존의 문제다

세계 최대 전기차 제조사 중 하나인 중국의 BYD(비야디)가 브라질에서 전례 없는 경영 위기를 맞이했다. 브라질 노동고용부가 운영하는 이른바 '더티 리스트(Dirty List)'에 BYD 브라질 법인이 공식 등재된 것이다. 단순한 벌금이나 경고장 수준의 행정 처분이 아니다. 국영 은행 대출 전면 차단, 민간 금융권의 거래 기피, 공공 입찰 자격 박탈이라는 삼중의 금융 제재가 동시에 작동하기 시작했다. 브랜드 이미지의 타격을 넘어, 기업의 생존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강제노동"이라는 딱지, 어떻게 붙었나

BYD의 브라질 법인에 제기된 혐의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과도한 노동 시간이다. 태양광 패널 및 전기차 부품 생산 시설에서 법정 한도를 초과하는 장시간 노동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둘째는 안전 규정의 조직적 위반이다. 작업 현장의 기본적인 안전 장비와 환경이 국제 기준에 크게 미달했다는 점이 현장 조사에서 드러났다. 셋째, 그리고 가장 심각한 혐의는 강제노동에 준하는 고용 형태다.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이직하거나 계약을 해지하기 어려운 구조적 환경 속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 브라질 당국의 판단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강제노동'이라는 개념의 범위다. 흔히 강제노동이라 하면 물리적 감금이나 폭력을 떠올리기 쉽지만, 국제노동기구(ILO)와 각국의 노동법은 훨씬 넓은 의미로 이를 정의한다. 채무 구속, 과도한 위약금 조항, 여권이나 신분증 압수, 그리고 현실적으로 퇴직이 불가능한 경제적 압박 구조 역시 강제노동의 범주에 포함된다. BYD의 브라질 협력 공장에서 포착된 것은 바로 이 회색지대의 관행들이었다.

문제는 BYD 본사가 이 시설들을 직접 운영하지 않았다는 점을 방패삼아 왔다는 데 있다. 생산의 일부를 현지 협력업체에 위탁했고, 그 협력업체의 노동 관행은 자신들의 책임 범위 밖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브라질 당국은 이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공급망의 최상단에 위치한 원청 기업이 하청 단계에서 발생하는 인권 침해에 대해 실질적 책임을 진다는 원칙이 브라질 노동법의 핵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BYD는 왜 이 신호를 무시했나

돌이켜보면, 경고 신호는 여러 차례 있었다. 브라질 노동 감독관들이 해당 시설을 방문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며, 현지 노동조합과 시민사회 단체들은 수개월 전부터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럼에도 BYD의 대응은 늦었고, 소극적이었다.

그 배경에는 몇 가지 구조적 요인이 자리한다. 우선, 속도에 대한 집착이다. BYD는 포드가 철수한 바이아주 카마사리 공장을 인수해 남미 최대의 전기차 생산 기지로 전환하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 중이었다. 이 과정에서 공장 가동 일정과 생산 목표를 맞추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고, 협력업체의 노동 환경에 대한 실사는 상대적으로 후순위로 밀렸다.

다음으로는 본사와 현지 법인 사이의 거버넌스 공백이다. 글로벌 기업들이 해외 시장에 빠르게 진출할 때 흔히 발생하는 문제로, 본사의 ESG 정책이 현지 공급망 말단까지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를 검증하는 시스템이 미비했다. 선언은 있었으나 집행이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신흥 시장에 대한 과소평가다. 일부 글로벌 기업들은 여전히 신흥국 시장에서의 노동 규제를 선진국에 비해 덜 엄격하게 취급하는 관성을 가지고 있다. 브라질이 룰라 행정부 출범 이후 ESG 기준을 빠르게 강화하고 있다는 변화의 흐름을 BYD가 충분히 읽지 못했거나, 읽었더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가 더티 리스트 등재와 금융 제재라는 값비싼 청구서로 돌아왔다.

한국 기업들은 타산지석으로 삼고 있는가

BYD의 사례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브라질, 미국, 유럽연합 등 주요 시장들이 공급망 인권 실사를 법제화하는 흐름 속에서, 해외 생산 거점을 적극적으로 운영하는 한국 기업들 역시 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실제로 한국은 반도체, 배터리, 철강, 의류 등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고리 곳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공급망의 하단에는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노동 인권 취약 지역의 협력업체들이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미국의 위구르 강제노동 방지법(UFLPA)이 한국 배터리 소재 공급망을 조준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현실이 된 리스크다. 신장산 원자재가 공급망 어딘가에 섞여 들어왔다는 의혹만으로도 미국 세관은 화물 통관을 거부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사례들이 발생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공급망 실사 지침(CSDDD) 역시 한국 기업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EU 시장에 제품을 수출하거나 EU 기업과 거래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은 자사 공급망 전반에 걸친 인권·환경 실사 의무를 지게 된다. 종이 위의 윤리 선언이 아니라, 실제로 공급망을 추적하고 문제를 발견하면 시정하는 행동을 입증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기업들의 현실은 어떤가.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ESG 경영 보고서 발간과 공급망 행동규범 제정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공급망 말단의 실제 노동 현장까지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1차 협력업체 관리는 어느 정도 이루어지더라도, 2차·3차로 내려갈수록 실사의 손길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업계의 솔직한 실상이다.

BYD가 브라질에서 당한 것은 결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공급망 인권 경영을 형식적 컴플라이언스가 아닌 실질적 경영 전략으로 내재화하지 못한 기업이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위기다. 금융 제재, 시장 퇴출, 브랜드 붕괴라는 결말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씨앗은 오래전부터 공급망 어딘가에 뿌려져 있었다.

이제 공급망 인권 경영은 착한 기업이 되기 위한 덕목이 아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되었다. BYD의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아, 지금 당장 자사 공급망의 어느 고리가 취약한지를 들여다봐야 할 때다.


2026년 4월 8일 수요일

왜 미국 소비자들은 타겟 참치에 70억을 청구했나

타겟(Target) 참치 소송: 당신이 사는 '착한 참치'는 정말 착한가?


왜 그린워싱인가

"지속가능하게 포획했습니다(Sustainably Caught)."

마트에서 참치 캔을 집어 들 때 이런 문구를 본 적 있는가? 푸른 바다, 건강한 생태계, 책임감 있는 어업. 그 짧은 문구 하나가 소비자의 손을 움직인다. 실제로 많은 소비자들이 친환경 인증이나 문구를 보고 기꺼이 조금 더 비싼 제품을 선택한다.

문제는, 그 문구가 현실과 다를 때다.

미국 유통 대기업 **타겟(Target)**의 자체 PB 브랜드 **굿 앤 개더(Good & Gather)**가 바로 그 지점에서 집단소송에 휘말렸다. 소비자 100명 이상이 원고로 참여한 이 소송의 청구금액은 약 500만 달러(한화 약 70억 원). 핵심 주장은 하나다.

"당신들은 소비자를 속였다."

제품에는 국제 해양관리협의회, MSC(Marine Stewardship Council) 인증 마크까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 공급업체인 **볼턴 그룹(Bolton Group)**의 어업 방식은 전혀 달랐다.

  • 연승어업(longline fishing):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낚싯줄에 수천 개의 바늘을 달아 바다에 던지는 방식. 바다거북, 상어, 바닷새 등 목표하지 않은 멸종위기종이 대량으로 혼획된다.
  • 선망어업(purse seine fishing): 거대한 그물로 물고기 떼 전체를 포위해 건져 올리는 방식. 물개, 상어, 바다거북이 함께 잡혀 올라온다.

원고 측은 타겟이 공급망의 이 같은 생태 파괴 문제를 알고도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지속가능'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친환경 이미지를 판매했지만, 실제 어업 현장은 그 반대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린워싱(Greenwashing)**이다. 실제보다 환경 친화적으로 보이게 포장하는 마케팅 기법. 소비자의 선의와 신뢰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다.


타겟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산물 그린워싱 소송의 흐름

타겟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수산물을 둘러싼 그린워싱 소송이 잇따르고 있다. 주요 사례들을 살펴보자.

Gorton's (고튼스) 미국의 대표적인 냉동 수산물 브랜드. '책임감 있는 어업(Responsibly Sourced)'이라는 문구와 MSC 인증을 내세웠지만, 실제 공급망에서의 혼획 문제와 어업 방식이 마케팅과 괴리가 있다는 지적을 받으며 소송에 휘말렸다.

ALDI 독일계 글로벌 할인마트 ALDI의 미국 법인도 자사 수산물 제품의 지속가능성 표시를 두고 유사한 소비자 소송을 경험했다. 저가 전략과 친환경 마케팅이 양립할 수 없다는 소비자 불신이 배경에 깔려 있다.

Mowi (모위) 세계 최대 양식 연어 기업인 노르웨이의 모위(구 Marine Harvest)도 도마에 올랐다. 양식 연어의 항생제 사용, 사료 문제, 해양 생태계 오염 등을 둘러싸고 '지속가능한 양식'이라는 홍보 문구가 과장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Conagra & Bumble Bee 미국 수산물 캔 시장의 대표 주자들인 이 두 기업도 참치 제품의 친환경 인증 및 표시와 관련해 소비자 단체와 법적 분쟁을 겪었다. MSC 인증의 실효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소송도 포함됐다.

Red Lobster (레드 랍스터) 미국 최대 해산물 레스토랑 체인 레드 랍스터 역시 메뉴판에 표기한 지속가능 수산물 관련 문구가 실제와 다르다는 이유로 소송을 받았다. 식당 업계로까지 그린워싱 소송이 번진 사례다.

이 사례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소비자의 환경 의식이 높아질수록, 기업의 친환경 주장에 대한 법적 책임도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그린워싱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

우리는 지금 '착한 소비'의 시대를 살고 있다. 환경을 생각하고, 동물 복지를 고려하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소비 결정을 내린다. 그 자체는 분명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 선의(善意)가 기업에게 마케팅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친환경', '지속가능', '자연산', '책임 어업'이라는 단어들은 이제 소비자의 지갑을 여는 열쇠가 됐다. 문제는 이 단어들을 검증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MSC 같은 국제 인증도 완벽하지 않다. 인증을 받은 어업 방식이 실제 어장에서 그대로 지켜지는지 감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렇다면 소비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 문구보다 인증의 내용을 살펴보자. MSC, ASC 등 인증의 의미와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 브랜드의 공급망 투명성을 확인하자. 어디서, 어떻게 잡혔는지 구체적인 정보를 공개하는 기업인지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 집단적 목소리가 변화를 만든다. 이번 타겟 소송처럼, 소비자의 법적 대응이 기업 행동을 바꾸는 강력한 수단이 되고 있다.

타겟의 참치 캔 한 개의 이야기는 결국 이 질문으로 돌아온다.

당신이 사는 '착한 제품'은 정말 착한가?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그린워싱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2026년 4월 7일 화요일

틀린 질문이 만든 틀린 답 — ESG 논쟁의 구조적 함정

"ESG가 돈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이제는 바꿔야 할 때 — 박정훈 교수 기고문 읽기


미국 Loyola Marymount University 경영대학 조교수로 재직 중인 박정훈 교수가 2026년 4월 3일 임팩트온(impacton.net)에 특별기고문을 게재하였다. 박 교수는 CUNY Baruch College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글로벌 지속가능경영 전략을 핵심 연구 분야로 삼아 Journal of International Business Studies, Business & Society 등 세계 최상위 학술지에 다수의 논문을 게재한 바 있다. Academy of International Business 최우수 이론 논문상을 수상하였고, 현재 Business & Society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가 이번 기고를 통해 던진 질문은 단순하지만 묵직하다. "ESG가 재무성과를 높이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이미 잘못 설정된 것이 아닌가.


핵심 메시지: 'ESG = 수익'이라는 등식은 취약한 근거 위에 서 있다

박 교수는 ESG가 2004년 유엔글로벌콤팩트(UNGC)의 보고서 Who Cares Wins를 통해 공식화되었고, 2006년 유엔책임투자원칙(PRI)을 거쳐 전 세계로 확산되었음을 상기시킨다. 한국에서는 2020년 국민연금의 ESG 투자 확대 선언 이후 본격적인 주류 담론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는 ESG를 혁신적 개념으로 미화하기보다,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활동을 측정 및 비교 가능한 형태로 정리한 프레임워크로 냉정하게 정의한다.

문제는 그 이후에 전개된 담론의 방향이다. 수백 편에 달하는 학술 연구들이 ESG 활동과 재무성과 간의 관계를 검증하였으나, 그 결론은 일관되지 않다. 긍정적 영향을 주장하는 연구, 부정적 영향을 보고하는 연구, 유의미한 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연구가 공존한다. 박 교수는 이러한 혼란의 구조적 원인을 세 가지로 짚는다. 첫째, E(환경)·S(사회)·G(지배구조)는 그 성격이 본질적으로 상이함에도 하나의 통합 점수로 환원되는 정의의 모호성, 둘째, 동일한 ESG 활동이라도 기업·산업·이해관계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되는 맥락 의존성, 셋째, ESG의 순수한 재무적 효과만을 다른 변수들로부터 분리해내기 어려운 방법론적 복잡성이 그것이다.

더 나아가 박 교수는 ESG 연구의 대표 논문으로 광범위하게 인용되어온 하버드·런던비즈니스스쿨 연구진(Eccles, Ioannou, Serafeim)의 2014년 논문 사례를 제시한다. 해당 연구는 ESG에 적극적인 기업이 장기적으로 더 우수한 재무성과를 낸다는 결론으로 학계와 실무계 양측에서 핵심 근거로 활용되어왔다. 그러나 2025년 Boston University의 Andrew King 교수가 수행한 재현 연구에서 동일한 결과가 도출되지 않았으며, 원 저자들 역시 통계적 유의성 보고 오류를 인정하고 정오표를 게재하였다. 이 사례는 ESG-재무성과 연구의 신뢰성 전반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기업 실무 영역에서도 비슷한 균열이 드러난다. 미국 주요 기업들이 ESG 성과를 CEO 보너스 산정에 연동하는 제도를 도입하였으나, 연구 결과 ESG 목표는 재무 목표에 비해 지나치게 달성하기 쉬운 수준으로 설정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재무 목표 미달 비율이 22%에 달하는 반면 ESG 목표 미달은 2%에 불과하였다는 수치는, "ESG를 하면 돈이 된다"는 전제 위에 설계된 제도가 실질적 변화보다 형식적 목표 달성 구조만을 고착화할 수 있음을 방증한다.


인사이트: 질문의 틀을 다시 짜야 할 시점

이 기고문이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는 ESG를 부정하거나 폄훼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박 교수의 논지는, 지금까지 ESG 논의가 "ESG가 수익을 창출하는가"라는 실용주의적 질문에 과도하게 종속되어 왔으며, 그 결과 근거가 불충분한 win-win 프레임이 학계와 실무계 모두에서 비판 없이 통용되어 왔다는 점을 직시하라는 데 있다.

ESG의 정당성이 재무적 수익성에 의존하는 한, 시장 환경이 바뀌거나 그 연결고리가 흔들리는 순간 ESG 전체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실제로 최근 미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반(反)ESG 정서와 ESG 펀드의 유출 현상은, 수익성 논리만으로는 ESG를 지탱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징후로 읽힌다. 박 교수가 2부에서 예고한 질문, 즉 "그렇다면 기업은 왜 ESG를 해야 하는가"는 그런 의미에서 더욱 본질적이다. 이는 ESG의 존재 이유를 재무성과라는 도구적 가치에서 벗어나, 보다 근본적인 규범적·전략적 토대 위에서 재정립하려는 시도다.

한국의 ESG 담론이 여전히 "ESG를 하면 기업가치가 오른다"는 도식적 명제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박정훈 교수의 이번 기고는 단순한 학술적 논평을 넘어 실무 의사결정자들에게도 진지한 재검토를 촉구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질문이 바뀌어야 답도 바뀐다.


2026년 4월 6일 월요일

관리가 잘 되던 회사도 안전이 부실해질 수 있는 이유

수익성 좋은 회사가 왜 — 안전에는 구멍이 있었나

2026년 3월 20일, 대전 대덕구 문평동 · 화재로 인한 참사의 구조적 분석


먼저, 이 회사는 어떤 곳이었나

A자동차부품은 1953년에 설립된, 7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자동차·선박용 엔진 밸브 전문 제조사다. 현대차, 기아차는 물론 미국 크라이슬러,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등 해외 완성차 업체와도 OEM 계약을 맺고 제품을 납품해왔다. 2024년 기준 연매출은 1,351억 원, 직원 364명 규모의 중견기업이다. 국내 최초로 하이브리드 차량용 중공 밸브를 국산화해 연간 1,000억 원 이상을 수출한 공로로, 화재가 나기 불과 얼마 전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이 회사는 '잘 관리되는 기업'의 범주에 속했다. 그렇기에 화재 이후 언론이 일제히 쏟아낸 '안전 불감증', '관리 부실' 같은 보도들이 낯설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수익성이 높고 수출 실적까지 탄탄한 회사가, 정말 안전을 방치하고 있었던 걸까.


화재 이후 보도들이 말한 것

사고 직후 쏟아진 기사들은 공통적으로 세 가지를 지목했다. 화재 확산을 키운 샌드위치 패널 구조, 불법 증축으로 막혀버린 대피로, 그리고 물과 닿으면 폭발적으로 반응하는 금수성 물질인 나트륨의 부적절한 관리였다.

노조 위원장은 화재 이틀 뒤 직접 브리핑에 나서 "집진시설과 공조·배관 등 화재 위험 요소 개선을 산업안전보건회의를 통해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고 밝혔다. 유증기와 기름 찌꺼기가 천장에 축적될 가능성을 반복해서 지적했지만,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방 점검에서는 펌프 압력 미달 지적을 받은 기록도 확인됐다. 결과만 놓고 보면 '안전을 소홀히 한 회사'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수익성과 안전관리는 같은 축이 아니다

A자동차부품이 70년간 꼼꼼하게 관리해온 것은 '생산 효율'과 '품질'이었다. 현대차 같은 대형 완성차 업체와 OEM 계약을 유지하려면 납기, 불량률, 단가 경쟁력이 핵심이다. 그 축에서는 흔들림이 없었기 때문에 은탑산업훈장까지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안전관리가 그 축과 다른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안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집진시설을 교체하든 안 하든, 내일 당장 공장은 돌아간다. 나트륨 보관 방식을 바꾸지 않아도 수주는 끊기지 않는다. 반면 생산 라인이 하루 멈추면 납기 일정이 어긋나고 거래처와의 관계에 금이 간다. 기업이 어디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는 구태여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이것이 잘 나가는 회사가 안전을 '방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실제로는 방치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문제이며, 그 우선순위가 뒤틀리도록 만든 구조의 문제다.


법 안에 있었다는 것의 역설

이 사고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A자동차부품이 대부분의 문제를 '법적으로 허용된 범위 안에서' 운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공장은 연면적 3만㎡ 기준에 미치지 못해 소방당국의 화재안전 중점관리대상에서 제외돼 있었다. 나트륨이라는 특수 위험물을 취급하는 공장임에도, 관리 기준은 '위험도'가 아닌 '면적'으로 나뉘었다. 소방 점검은 연 2회, 사측이 지정한 민간 업체가 담당했다. 샌드위치 패널은 2021년 이후 신축 건물엔 준불연 자재 사용이 의무화됐지만, 그 이전에 지어진 기존 건물에는 소급 적용이 없었다. A자동차부품의 공장은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나트륨 100㎏은 위험물안전관리법상 지정수량인 10㎏의 열 배였다. 전용 소화 설비를 갖춰야 하는 수량이었지만, 이 공장에는 D급 금속화재에 대응할 설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소방 당국은 초기에 나트륨 때문에 물을 쓸 수 없었고, 이를 안전 구역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골든타임을 허비해야 했다. 10시간 30분 만에 겨우 불길이 잡혔을 때, 사망자는 14명이었다.


이 사고가 실제로 말하는 것

화재 후 대표이사는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으로 입건됐다. 책임은 물어야 하고, 수사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 사고를 '한 회사의 안전 불감증'으로만 읽으면, 다음 사고를 막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노조는 위험 요소를 반복해서 지적했다. 법이 허용한 구조 안에서 공장은 운영됐다. 민간 점검은 통과했다. 그럼에도 74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것은 개인의 불찰을 넘어선 무언가를 가리킨다.

위험도가 아닌 면적으로 나뉘는 관리 체계, 민간에 위탁된 형식적인 점검, 구건물에 소급 적용되지 않는 건축 기준, 특수 위험물에 맞지 않는 대응 설비 기준. 이 구조는 A자동차부품 이전에도 있었고, 이번 사고 이후에도 손대지 않으면 그대로 남는다.

2024년 경기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로 23명이 숨졌다. 전문가들이 지목한 구조적 원인은 이번과 거의 같았다. 특수 위험물로 인한 초기 대응 지연, 빠른 연소 확대를 부르는 건물 구조, 형식에 그친 점검 체계. 그리고 2년이 채 되지 않아, 대전에서 14명이 또 같은 방식으로 숨졌다.

비난보다 앞서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같은 구조 안에서 얼마나 더 기다릴 것인가.


알레오 인사이트


"사고가 나면 사건 처리로 끝나고, 구조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연세대 조원철 교수가 이번 화재를 두고 한 말이다. 아리셀 참사 이후에도 같은 말이 나왔고, 그 이전 이천 물류창고 화재 때도 같은 말이 나왔다. 문제는 이 말이 매번 새 사고의 잔해 앞에서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번 화재에서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짚은 지점은 크게 세 가지다.

  1. 첫 번째는 위험물 분류 체계의 불일치다. 나트륨은 소방 분류상 D급 금속 화재에 해당하는 물질로, 물과 접촉하면 수소 가스와 막대한 반응열을 발생시켜 폭발적 연소로 이어진다. 그런데 현장에는 이에 대응할 전용 소화 설비가 없었다. 전문가들은 "금속 화재는 한 번 발생하면 대응 자체가 제한되는 특수 영역"이라고 말한다. 일반 화재와 같은 기준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험물을 다루는 사업장의 안전 설비 기준이 위험물의 종류가 아닌 보관 면적이나 수량 기준에만 묶여 있는 한, 이런 빈틈은 계속 생길 수밖에 없다.
  2. 두 번째는 건축 기준의 시간차 문제다. 샌드위치 패널은 1970년대 이후 국내 공장과 창고에 광범위하게 쓰여온 자재다. 화재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수십 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정부도 2021년에야 신축 건물에 준불연 자재 사용을 의무화했다. 문제는 그 이전에 지어진 수많은 건물이다. 소급 적용이 없으니, 노후 산업단지는 여전히 과거 기준의 건물 안에서 오늘의 공정을 돌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전면 철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최소한 소방 시설 보강과 점검 횟수 확대라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법 기준을 통과한 건물이라도 위험도 기준으로는 별도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3. 세 번째는 점검 체계의 구조적 허점이다. 현재 많은 사업장의 소방 점검은 사측이 지정한 민간 업체가 연 1~2회 진행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구조다. 점검 업체 입장에서는 지적 사항을 최소화하는 것이 재계약에 유리하고, 사업장 입장에서는 점검을 통과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 실질적인 위험 탐지보다 서류 완비에 초점이 맞춰지는 이유다. 조원철 교수가 이를 '구조적 방치'라고 표현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결국 이번 사고가 드러낸 것은 세 가지 체계가 동시에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위험물 관리 기준, 건축물 안전 기준, 점검 체계. 어느 하나만 제대로 작동했어도 피해의 규모는 달라졌을 수 있다.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방향은 명확하다. 면적이나 형식 기준이 아닌 실질 위험도 기준으로의 전환, 위험물 취급 사업장에 대한 전수 점검과 전용 소화 설비 의무화, 노후 산업단지에 대한 소방 안전망의 근본적인 재설계다. 그리고 이 모든 논의가 이번에도 사고 처리로 끝날지, 아니면 구조 개선으로 이어질지는 지금부터의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사월의 벚꽃, 그리고 우리

 

벚꽃은 찰나에 지지만, 그 아름다움을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사월의 첫 일요일 아침, 봄바람이 분다. 거리마다 벚꽃 잎이 흩날리고, 어디선가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온다. 버스커버스커의 노래가 봄이면 어김없이 귓가를 맴도는 것은, 그 선율 안에 계절이 통째로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 그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어디론가 따뜻하게 열린다.

벚꽃이 아름다운 것은 피어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한순간 활짝 열렸다가 바람에 흩어지는 그 무상함이,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더 빛나게 한다. 손을 잡고 걷는 두 사람, 이름 모를 떨림, 봄바람에 겹쳐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 — 이 모든 것이 찰나이기에 소중하다. 삶의 가장 빛나는 장면들은 대개 그렇게, 오래 머물지 않는 것들 속에 있다.

오늘 인천의 거리에도, 서울의 공원에도, 부산의 바닷가에도, 그리고 지구 반대편의 어느 도시에도 사람들이 봄빛 아래 걷고 있을 것이다. 언어가 다르고, 얼굴이 다르고, 삶의 무게가 달라도, 꽃 앞에 멈춰 서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 벚꽃은 국경을 묻지 않는다. 봄바람도 편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여전히 전쟁과 분쟁, 빈곤과 혐오의 그늘 아래 있다. 누군가에게 오늘의 봄은 포탄 소리 너머에 있고, 누군가에게 벚꽃 구경은 먼 나라의 사치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렇기에 이 계절의 아름다움은 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이 평화를, 이 설렘을, 이 봄을 — 우리는 모두에게 돌려줄 수 있는가.

사랑하는 연인들이 많고, 알 수 없는 친구들이 많고, 흩날리는 벚꽃 잎이 많은 세상. 그 노랫말처럼 평범하고 아름다운 일상이 인류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 총성 대신 봄바람이 울려 퍼지는 거리, 공포 대신 설렘이 가득한 골목, 그런 세계가 단순한 낭만이 아닌 현실로 이어지기를.

벚꽃은 오늘도 진다. 하지만 내년에도 다시 핀다. 우리가 지켜낸다면.

이 봄, 어디선가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 — 평화와 안녕이 함께하기를.


2026년 4월 5일 일요일

부활절, 리스크 관리자의 고백 — 신앙인으로서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

 

리스크를 관리하는 사람도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관리할 수 없다 — 부활절은 그 무력함을 은총으로 바꾸는 날이다..


수십 년간 기업의 리스크를 분석하고, 불확실성을 수치화하고,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왔다. 손실 가능성을 계량하고, 보험 프로그램을 설계하며, 조직이 위기 앞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돕는 것이 나의 직업적 소명이었다. 그런데 매년 부활절이 되면, 나는 그 모든 분석의 도구를 내려놓고 전혀 다른 질문 앞에 선다. "나 자신의 내면은 과연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

이 글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오랜 비즈니스 현장에서 인간과 조직의 위기를 목격해온 전문가로서, 부활절 앞에 마음을 새롭게 하는 나의 개인적 성찰이다.

  1. 리스크를 관리하는 사람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리스크 관리의 본질은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오래 일할수록 하나의 진실이 분명해진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업의 평판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치밀하게 설계한 보험 프로그램도 예상치 못한 변수 앞에서 빈틈을 드러낸다. 나는 그 빈틈을 수없이 목격했다.

부활절은 내게 이것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것 — 죽음과 부활 — 을 하느님은 이미 당신의 손 안에 두셨다는 사실을. 리스크 관리자로서의 나는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도록 훈련되어 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의 나는 그 불확실성 너머에 섭리가 있음을 믿도록 초대받는다. 부활절마다 나는 이 두 자아 사이의 긴장을 직면하고, 그 긴장 안에서 비로소 진짜 내려놓음을 배운다.

  1. 완고함이라는 내면의 리스크

오랜 직업적 경험은 판단력을 키우지만, 동시에 완고함이라는 내면의 리스크를 키우기도 한다. 수많은 케이스를 다뤄온 전문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확신으로 굳어간다. 가정에서도, 신앙 공동체에서도, 그 굳음은 관계의 벽이 된다.

부활절 고해성사는 내게 단순한 의례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쌓아온 전문적 자만심, 오래된 원망, 그리고 변화를 거부하는 내면의 경직성을 하나씩 꺼내 놓는 시간이다. 무덤의 돌이 굴려지려면 먼저 그 돌이 내 안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부활절은 그 인정을 요청하는 계절이다.

  1. 남은 소명 — 전문성을 넘어선 섬김으로

리스크 관리와 기업 보험 분야에서 쌓아온 경험과 지식은 분명 가치 있는 자산이다. 그러나 부활절이 되면 나는 묻는다. "이 전문성이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를 위한 섬김의 도구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먼저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셨다. 권위나 지식을 내세우지 않으셨다. 나는 그 모습에서, 내 남은 전문적 여정이 어떤 태도로 걸어가야 하는지를 본다. 더 많은 계약, 더 높은 성과가 아니라 —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 내가 자문하는 기업들에게, 그리고 신앙 공동체에게 진심으로 평화를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올 부활절 내가 새롭게 다짐하는 소명이다.

#부활절 #가톨릭 #신앙성찰 #리스크관리 #기업보험 #내면여정 #그리스도인 #부활신앙 #Easter #CatholicFaith #RiskManagement #InnerJourney #Renewal #Faith #BusinessAndFaith


2026년 4월 4일 토요일

연구실에서 시장으로 — 차미선 대표가 걷는 재생의료의 길

"좋은 기술이 왜 산업으로 이어지지 못하는가." 이 물음 하나가 한 연구자를 창업가로 바꾸었다. 메디팹 차미선 대표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그것은 과학과 시장 사이의 거리를 스스로 좁혀온 퍼스트무버의 사유다.


1. 연구자의 눈으로 시장을 본다는 것

부산대와 서울대에서 연구자로 살아온 차미선 대표에게 창업은 어쩌면 낯선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험실 안에서 해답을 찾는 대신, 기술이 세상과 만나는 접점을 직접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 출발점은 단순한 사업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왜 이렇게 좋은 기술이 산업으로 이어지지 못하는가"라는 깊은 문제의식이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키토산과 탈세포기질(dECM)이라는 두 가지 소재였다. 수용성 키토산 플랫폼 키토젠(Chitogen™), 탈세포기질 기반 리젠트릭스(Regentrix™), 두 기술을 결합한 키토제닉스(Chitogenix™)—이 세 가지 핵심 기술 위에 그는 단일 제품이 아니라 '재생 플랫폼'이라는 개념 자체를 설계했다.

"실행이 전략을 이긴다. 시장이 곧 실험실이다." — 차미선, 메디팹 대표

이 원칙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었다. 스킨케어 브랜드 레스노베(Lesnove)로 시장에 먼저 진입하고, 두피 재생 의료기기 인증을 획득하며 탈모 시장으로 확장하고, 이제 서울대병원과 함께 골관절염 치료제 국가 과제를 진행하는 — 이 모든 과정이 하나의 일관된 플랫폼 전략의 실행이었다.

성장 4단계

  • 1단계: 부산대·서울대 연구 기반, 기술의 산업화 문제의식으로 메디팹 설립
  • 2단계: 키토젠·리젠트릭스·키토제닉스 플랫폼 완성, LTG 기술로 시술 편의성 확대
  • 3단계: 스킨케어→탈모→관절재생까지 플랫폼 확장, 2024년 매출 100억 달성
  • 4단계: 누적 290억 투자 유치(시리즈B 238억 포함), 2027~2028 코스닥 상장 목표

핵심 수치

  • 누적 투자 유치 290억 (시리즈B 238억 포함)
  • 2026년 매출 목표 300억 (2024년 100억 대비 3배 성장)
  • 코스닥 상장 목표 2027~2028년 (임상·인허가 기반 검증 우선)

2. 차미선 대표 리더십의 세 가지 얼굴

차미선 대표의 리더십은 '연구자 출신 CEO'라는 단순한 수식어로 요약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특별함은 연구자의 엄밀함과 창업가의 실행력이 공존한다는 점에 있다.

① 기술-제품-매출-재투자 구조를 직접 설계한다

외부 전략가에게 맡기지 않는다. 핵심 기술에서 시장 진입 전략, 매출 구조, 재투자 사이클까지 — 연구자 출신답게 전체 시스템을 스스로 이해하고 설계한다. 이것이 메디팹이 단일 제품 기업이 아닌 '재생 플랫폼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다.

② 조직의 체질을 바꾸는 리더

연구개발 중심에서 시장 중심 조직으로의 체질 개선 — 이것은 선언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차 대표는 "시장이 곧 실험실"이라는 원칙을 내부 문화로 정착시키며, 속도보다 검증을 우선하는 균형 감각을 유지한다. 상장도 빠른 출구보다 임상·인허가 기반 신뢰 확보를 먼저 선택한 것이 그 증거다.

③ 노화의 패러다임 자체를 재정의한다

경쟁사가 '외형 개선'을 말할 때, 차 대표는 '인체의 재생 능력 활성화'를 말한다. 미용에서 재생으로, 재생에서 치료제로 — 이 방향성 자체가 이미 시장을 창출하는 리더십이다. "100년 가는 글로벌 재생의료·항노화 기업"이라는 비전은 허황된 구호가 아니라 플랫폼 전략의 논리적 귀결이다.


3. 다른 경영자들에게 주는 세 가지 메시지

차미선 대표의 여정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재생의료'라는 업종에 한정되지 않는다. 업종을 초월해 적용 가능한 경영 사유가 그 안에 있다.

A. 문제의식이 곧 비즈니스 모델이다

"좋은 기술이 산업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순수한 문제의식이 창업의 씨앗이 되었다. 많은 경영자가 시장 기회를 찾으려 하지만, 차 대표는 시장의 구조적 결함을 먼저 보았다. 불편함과 모순이 보이는 곳에 진짜 기회가 있다.

B. 플랫폼을 팔아라, 제품을 팔지 마라

메디팹의 경쟁력은 특정 제품이 아니라 키토젠·리젠트릭스라는 재생 플랫폼에서 나온다. 스킨케어, 탈모, 관절 재생 — 세 개의 다른 시장이 하나의 플랫폼으로 연결된다. 제품을 팔면 시장이 하나지만, 플랫폼을 구축하면 시장이 확장된다.

C. 속도보다 검증, 검증 위에 속도

상장을 서두르지 않고 임상과 인허가로 신뢰 기반을 먼저 쌓는 판단 — 이것이 단기 지표에 쫓기는 경영과 100년 기업을 지향하는 경영의 차이다. 그러나 검증이 완료된 영역에서는 빠르게 확장한다. 균형 감각이 리더십의 핵심이다.


마치며

차미선 대표는 재생의료라는 새로운 언어를 시장에 가르치고 있다. 연구실에서 출발한 문제의식이 290억의 투자로, 세 개의 시장 진입으로, 그리고 글로벌 항노화 기업이라는 비전으로 구체화되는 과정 — 그것은 단순한 창업 성공담이 아니라, 지식과 실행 사이의 거리를 스스로 좁혀온 한 사람의 깊은 사유다.

퍼스트무버는 가장 빠른 사람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장을 먼저 상상하는 사람이다.


불 꺼진 세상을 걷는 법 —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로 읽는 리스크 관리


생존이란 단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 살아남는가의 문제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 『더 로드』는 문명이 완전히 붕괴된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하늘은 재로 뒤덮여 있고, 식물은 모두 죽었으며, 살아남은 인간들은 서로를 먹이로 삼는다. 그 속에서 한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남쪽을 향해 걷는다. 목적지가 안전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걷는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것이 단순한 디스토피아 소설이 아님을 직감했다. 이것은 불확실성 속에서 어떻게 결정을 내리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다시 말해, 리스크 관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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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크는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것이다

소설 속 아버지는 완벽한 안전을 추구하지 않는다. 완벽한 안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하는 모든 선택은 '어느 리스크를 감수하고, 어느 리스크를 피할 것인가'의 연속이다. 식량이 담긴 지하실을 발견했을 때, 그는 덫일 수 있다는 위험을 알면서도 들어간다. 굶어 죽는 리스크가 더 크기 때문이다.

현실의 리스크 관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우리는 항상 두 가지 이상의 리스크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리스크다. 현금만 보유하면 인플레이션 리스크에 노출되고, 투자하면 시장 리스크에 노출된다. 중요한 것은 어느 위험이 자신의 목표와 상황에 더 치명적인가를 판단하는 능력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것의 힘

아버지는 항상 최악을 가정한다. 도시에 들어가기 전, 그는 '여기서 포위당하면 어떻게 탈출할까'를 먼저 생각한다. 수중에 총알이 몇 발 남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며, 아들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선택지까지 마음속에 준비해두고 있다. 이것은 비관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스트레스 테스트다.

리스크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는 시나리오 분석이다. '모든 것이 잘 풀릴 경우'만 계획하는 사람과, '모든 것이 무너질 경우'까지 대비하는 사람의 생존율은 위기 앞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살아남은 기관들은 대부분 미리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유동성을 확보해둔 곳들이었다. 최악을 상상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준비다.


신뢰의 경제학 — 누구와 함께 걷는가

소설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는 자연재해가 아니다. 다른 인간이다. 아버지는 처음 마주치는 사람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아들은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저 사람도 착한 사람이에요?" 아이의 질문은 단순히 감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협력 가능한 파트너를 식별하려는 본능적인 리스크 판별이다.

조직과 비즈니스에서도 파트너 리스크는 종종 가장 과소평가되는 리스크다. 계약서가 완벽해도, 상대방의 신용이나 의지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누구와 일할지, 누구와 자원을 나눌지를 결정하는 것 자체가 핵심적인 리스크 관리 행위다. 공급망 리스크, 파트너십 리스크, 인사 리스크 — 이 모두는 결국 '누구를 신뢰할 것인가'의 문제로 수렴한다.


목적 없는 생존은 지속 불가능하다

소설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버티게 하는 것은 체력이나 식량이 아니다. '불을 운반한다'는 감각이다. 이 불은 인간성의 상징이자, 살아남아야 할 이유다. 아버지는 몸이 무너져가면서도 아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마지막 에너지를 쏟는다.

리스크 관리에서 흔히 간과되는 것이 있다. 바로 '왜 이 리스크를 관리하는가'라는 목적의 명확성이다. 리스크 관리는 손실을 줄이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다. 어떤 가치와 목표를 지속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기업이 위기 상황에서 브랜드를 지키려 할 때, 그 이면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 그 답이 없으면, 위기가 지나간 후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더 로드』는 희망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무너진 세계에서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계속 나아갈 이유를 만들어준다. 리스크 관리도 결국 같은 지점으로 돌아온다. 위험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한 것.

당신의 불은 지금도 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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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3일 금요일

Fastenal Company의 안전 우수성을 향한 여정: 준수를 넘어 문화로

안전 문화는 사고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고가 나기 전에 스스로 바꾸는 결단이 만든다.


산업안전 분야에서 가장 흔히 반복되는 실수는 '사고가 나야 바뀐다'는 사후 대응 논리에 갇히는 것이다. 미국 산업용 부품 유통 기업 Fastenal Company는 이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중대 사고가 없었음에도 2013년 스스로 안전 체계를 전면 재검토하며 규제 준수(Compliance) 중심에서 직원 보호 중심의 문화 전환을 선언한 것이다. 이 자발적 혁신의 여정은 2021년 미국 산업안전 전문 매체 EHS Today로부터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기업(America's Safest Companies)' 중 하나로 공식 인정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본 글은 Fastenal의 안전 프로그램 구조와 수상 의미를 분석하고, 한국 건설업이 참고해야 할 실무적 함의를 도출한다.


1. 프로그램의 구조: Big 4 Journey와 국제 표준의 결합

Fastenal 안전 혁신의 핵심은 위험의 우선순위화다. Safety Leadership Conference(SLC) 참여를 계기로 자체 사고 데이터를 심층 분석한 결과, 중대 부상의 대부분이 네 가지 작업 유형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이른바 'Big 4'로 명명된 이 항목은 락아웃/태그아웃(에너지 차단), 고소 작업, 동력 산업용 트럭 운용, 트레일러 고정이다.

2018년 시작된 'Big 4 Journey' 프로그램은 이 네 영역에 자원과 교육을 집중 투입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결과는 명확했다. 중대 부상 건수, 고중증 보험 청구, 규제 위반 사건이 모두 감소했다. 이후 Fastenal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ISO 14001(환경경영시스템)과 ISO 45001(산업안전보건경영시스템)을 기반으로 내부 EHS(Environment, Health & Safety) 시스템을 체계화했다. 개별 프로그램의 성공을 국제 표준 프레임워크로 제도화함으로써 지속 가능성을 확보한 것이다.


2. 수상의 의미: EHS Today 'America's Safest Companies'

EHS Today의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기업' 인증은 단순한 사고율 통계가 아닌, 안전 문화의 성숙도를 종합 평가하는 기준으로 알려져 있다. Fastenal이 2021년 이 인증을 받은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째, 출발점이 위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기업이 중대 사고나 규제 제재 이후 안전 투자를 확대하는 반면, Fastenal은 사전적·자발적 전환을 선택했다. 이는 안전을 비용이 아닌 경영 전략으로 내재화했음을 의미한다.

둘째, 수상이 종착점이 아니라는 점이다. Fastenal은 2025년 Safety Leadership Conference에서 지금까지의 여정과 향후 안전 전략을 발표할 예정이다. 외부 인정 이후에도 개선을 지속하는 이 태도 자체가 안전 문화의 본질을 보여준다.


3. 한국 건설업에 대한 함의

한국 건설업은 여전히 OECD 국가 중 산업재해 사망률 최상위권에 머물러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2022년) 이후 안전 투자가 늘었으나, 상당수 기업이 법적 리스크 회피 차원의 대응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Fastenal의 사례는 이 지점에서 세 가지 실무적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 번째는 위험의 선택과 집중이다. Fastenal이 수천 건의 데이터를 분석해 'Big 4'를 도출했듯, 한국 건설 현장도 기업별·현장별 사고 데이터를 정밀 분석해 핵심 위험 유형을 규명하고 자원을 집중 배분해야 한다. 추락, 끼임, 충돌 등 반복 유형에 대한 선제적 집중 관리가 실질적 효과를 낼 수 있다.

두 번째는 국제 표준의 내재화다. ISO 45001 인증 취득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당 프레임워크를 현장 운영 시스템과 연계해 실질적 관리 도구로 작동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세 번째는 문화 전환의 자발성이다. 규제 대응형 안전 투자는 규제가 바뀌면 흔들린다. Fastenal이 보여준 것처럼, 경영진이 사고 발생 이전에 스스로 체계를 점검하고 개선을 선언하는 자발적 리더십이 안전 문화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한다.


참고 자료

본 글은 EHS Today 및 Safety Leadership Conference(SLC) 공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Fastenal Company의 공식 ESG·EHS 보고 내용을 참조했다.


#산업안전 #안전문화 #Fastenal #EHS #중대재해처벌법 #건설안전 #ISO45001 #BigFourJourney #SafetyLeadership #한국건설업 #IndustrialSafety #SafetyExcellence #AmericasSafestCompanies #EHSToday #안전경영


건설 현장의 안전 패러다임 전환: 스마트 PPE에서 클라우드 EHS까지

중대재해처벌법 시대에 건설 안전의 경쟁력은 장비의 수준이 아니라 데이터를 생산하고 입증하는 체계의 완결성에서 결정된다.


중대재해처벌법 시대의 건설 안전: 기술이 '사후 대응'을 끝낸다

AWP Safety EHS 부사장 라이언 도빈스(Ryan Dobbins)가 미국 EHS 전문 매체 EHS Today에 기고한 분석(2025)은, 스마트 PPE부터 클라우드 기반 EHS 플랫폼까지 5가지 핵심 기술이 건설 현장의 안전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실무 관점에서 정리한다. 도빈스는 미국 33개 주와 캐나다 4개 주에서 연간 100만 개 이상의 작업 구역을 관리하는 AWP Safety의 안전 총괄로서, 이 글에 현장 기반의 높은 신뢰도를 부여한다. 한국 건설 산업은 지금 중대재해처벌법이라는 강력한 규제 압박 아래에 있다. 이 5가지 기술은 단순한 장비 도입의 문제가 아니라, 법적 의무 이행과 실질적 사고 예방을 동시에 달성하는 전략적 수단으로 읽혀야 한다.

  1. 중대재해처벌법이 요구하는 것: '경영자 책임'의 입증 구조

2022년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은 건설 현장에서 사망 사고가 발생할 경우, 경영책임자에게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핵심은 처벌 자체보다 '안전 의무 이행의 사전 입증'에 있다. 법원과 고용노동부는 기업이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에 대응한 체계적 조치를 취했는가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이 지점에서 기술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직관과 경험에 의존한 구두 안전 관리는 법적 증거 능력이 없다. 반면 데이터로 기록되고 클라우드에 저장된 안전 관리 이력은, 기업이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음을 입증하는 실질적 근거가 된다.

  1. 5가지 기술의 전략적 재해석: 규제 대응 도구로서의 가치

도빈스가 제시한 5가지 기술 각각은 중대재해처벌법 대응 맥락에서 구체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스마트 PPE(헬멧, 조끼, 웨어러블 센서)는 GPS·근접 센서·생체신호 모니터링을 통합해 제한구역 무단 접근, 장비 충돌 위험, 낙상·열사병 징후를 실시간으로 감지한다. 한국 건설 현장의 현실을 고려하면 이 기술의 의미는 더욱 선명해진다. 60대 이상 고령 작업자 비중이 빠르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웨어러블 기반 열사병·낙상 조기 경보는 인명 보호와 경영자 의무 이행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충족한다. 고용노동부가 스마트 안전장비 도입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정책 방향과도 자연스럽게 연계된다.

코칭 가능한 카메라(대시캠·장비 카메라)는 급제동, 과속, 산만 운전 등 위험 행동을 자동 감지하고 영상 기반 피드백을 생성한다. 한국 건설의 구조적 문제인 다단계 하도급 환경에서 이 기술의 가치는 특히 크다. 하도급별 안전 수준 편차를 "누가 교육했는가"가 아닌 "무엇이 실제로 발생했는가"라는 객관적 데이터로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고 발생 시 원청사의 관리·감독 의무 이행 여부를 입증하는 증거 자료로도 기능한다.

연결된 콘·바리케이드(Connected Cones)는 충돌·이동·속도 초과 등 현장 통제 장비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한다. 도심지 도로점용 공사나 지하철 인근 공사처럼 차량·보행자·장비가 동시에 얽히는 고밀도 환경에서 특히 적합하다. 위험 발생 즉시 알림을 전송해 현장 관리자가 실시간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든다.

클라우드 기반 EHS 플랫폼은 점검, 근접 사고, 교육, 시정조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통합·공유한다. 중대재해처벌법 대응에서 이 플랫폼이 갖는 의미는 결정적이다. 전국 혹은 해외에 분산된 복수 현장을 동시에 운영하는 한국 대형 건설사에게, 클라우드 기반 데이터 통합은 본사 경영책임자가 각 현장의 안전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지시할 수 있는 거버넌스 구조를 실현한다. 종이 보고서의 지연과 은폐 가능성을 제거하고, 안전 관리 체계의 작동 여부를 언제든지 입증 가능한 형태로 유지한다.

현장 마이크로러닝(3~5분 모바일 교육 모듈)은 공기 단축 압박이 심한 한국 건설 현장에서 현실적인 교육 대안이다. 장시간 집합 교육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작업 전 안전회의(TBM)와 자연스럽게 결합할 수 있으며, 날씨 변화나 신규 하도급 투입처럼 당일 발생하는 위험에 즉각 대응하는 교육을 제공한다. 한국 건설 현장에서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다국어 콘텐츠 제공도 가능하다.

  1. 데이터가 없으면 면책도 없다: 기술 도입의 본질적 의미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한국 건설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하는 딜레마가 있다. 안전 관리를 강화하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무엇을 갖춰야 법적으로 충분한지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이 5가지 기술은 그 불명확성을 해소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공통점은 하나다. 모두 데이터를 생산하고 기록하며 공유한다. 안전 의무 이행의 핵심이 '사전 인지와 체계적 대응'에 있다면, 그 증거는 결국 데이터에서 나온다. 기술 도입은 장비의 문제가 아니라 증거 생산 체계의 구축이다. 스마트 PPE가 감지한 위험 데이터, 카메라가 기록한 행동 이력, 클라우드 플랫폼에 저장된 점검·교육·시정조치 내역은 모두 법정에서 제출 가능한 자료가 된다.

  1. 전략적 우선순위: 한국 건설사의 도입 경로

모든 기술을 동시에 도입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규제 대응과 사고 예방 효과를 동시에 극대화하는 순서를 설정해야 한다. 우선 클라우드 기반 EHS 플랫폼의 도입이 기반이 된다. 나머지 기술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를 수렴하고 분석하는 플랫폼 없이는, 개별 장비의 효과가 파편화된 채 법적 증거 능력을 갖추기 어렵다. 그 위에 고령 인력 비중이 높은 현장에는 스마트 PPE를, 하도급 구조가 복잡한 현장에는 코칭 카메라를 우선 배치하는 방식이 효율적이다. 마이크로러닝은 어느 현장에서도 즉시 실행 가능한 낮은 진입 비용의 수단으로, 초기 교육 체계 구축에 활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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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2일 목요일

미국 인터넷 범죄 통계가 드러낸 사이버 리스크의 새로운 지형

사이버 범죄의 진화는 빈도의 문제가 아니라 규모의 문제이며, 한국 금융산업이 대비해야 할 위협의 중심은 시스템 해킹이 아니라 AI 기반 금융 기만이다.


보험연구원(Insurance Research Institute)이 최근 발간한 보고서 『미국 인터넷 범죄 피해 현황과 보험산업의 대응』(김혜란 연구원, 디지털금융연구실)은 미국 연방수사국(FBI) 인터넷범죄신고센터(IC3)의 2024년 연간 통계를 분석하며 사이버 범죄 피해의 구조적 변화와 보험산업의 대응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보고서가 담아낸 숫자는 단순한 통계를 넘어, 디지털 경제 전반이 직면한 리스크의 질적 전환을 보여준다.


  1. 빈도가 아니라 규모가 달라졌다

2024년 미국의 인터넷 범죄 신고 건수는 859,532건으로, 최근 5년 평균(연 83만 건) 대비 완만한 증가에 그쳤다. 그러나 피해액은 166억 달러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2020년 피해액이 41억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불과 4년 만에 4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이 수치가 전달하는 핵심 메시지는 명확하다. 사이버 범죄는 더 자주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발생할 때 더 많은 돈을 빼앗아가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범죄 유형별로 보면, 이 변화의 성격이 더욱 뚜렷해진다. 전통적으로 주목받던 해킹·랜섬웨어 등 사이버 공격은 26만 건에 피해액 15.7억 달러 수준이었다. 반면 금융 관련 사이버 사기는 33만 건이었음에도 피해액은 137억 달러로 전체의 83%를 차지했다. 사이버 범죄의 무게중심이 시스템 침해에서 금융 기만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 세 가지 피해 진원지: 투자사기, 고령층, 암호화폐

피해 구조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세 가지 진원지가 뚜렷하게 부각된다.

첫째, 투자사기다. 2024년 투자사기 피해액은 65.7억 달러로 단일 범죄 유형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이 수치는 3년간 2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기업 이메일 침해(BEC)가 27.7억 달러, 기술지원 사기가 14.6억 달러, 개인정보 침해가 14.5억 달러로 그 뒤를 이었다.

둘째, 고령층 피해의 폭발적 증가다. 60세 이상 피해자의 신고 건수는 147,127건으로 전년 대비 46% 증가했으며, 피해액은 약 48억 달러로 전체의 42%를 차지했다. 전년 대비 증가율도 43%에 달했다. 기술지원 사기와 가족 위기를 사칭한 음성 사기가 주요 수법으로 보고됐다. 고령층은 디지털 금융 환경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낮고, AI 기반 딥페이크·음성 합성 기술에 취약한 구조적 특성을 지닌다.

셋째, 암호화폐가 범죄 인프라로 고착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암호화폐 기반 범죄 피해액은 93억 달러에 달했으며, 이 중 고령층 피해만 28억 달러를 초과했다. 투자사기·로맨스 사기·피싱이 암호화폐와 결합하면서 국경 간 자금 이동이 용이해졌고, 신고는 200개국 이상에서 접수됐다. 주요 송금 목적지로는 홍콩, 베트남, 멕시코가 지목됐다.


  1. 보험산업의 대응: 특약 확대와 보장 압축의 동시 진행

사이버 리스크의 확대는 보험산업에도 구조적 변화를 강요하고 있다. 보고서는 일부 보험회사가 사이버 보험에 AI 기반 신원 사칭 보장을 특약으로 추가하는 한편, 일부는 하위 한도(Sub-limit) 또는 면책조항을 도입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인슈어테크 기업 Coalition이 딥페이크 대응 보증 조항을 신설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보험사들의 대응 방향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으로는 보장 범위를 넓혀 AI 기반 사기, 딥페이크 피해 등 신종 리스크를 커버하는 방향으로 상품을 고도화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보험료 인상, 자기부담금 상향, 약관 내 하위 한도 설정, 보안 유지 의무 위반 시 면책조항 적용 등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의료·금융 분야의 규제 강화는 기업의 사이버 보험 수요를 끌어올리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 시장 성장 자체는 지속될 전망이다.


  1. 한국 기업과 금융산업에 주는 함의

미국의 이 같은 추세는 한국 시장과 무관하지 않다. 몇 가지 측면에서 한국 기업과 금융산업이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우선, 금융 사이버 사기의 위협 수준이다. 한국 역시 보이스피싱, 투자사기, 기업 이메일 침해(BEC) 피해가 증가하고 있으며, AI 기반 음성·영상 합성 기술의 확산으로 사기 수법이 정교해지고 있다. 미국에서 확인된 '빈도 완만·규모 급증' 패턴이 한국에서도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고령층 보호 체계의 정비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는 국가 중 하나다. 디지털 금융 접근성 확대와 고령층 사이버 범죄 피해 증가가 동시에 진행되는 구조 속에서, 금융기관과 보험사의 고령층 맞춤형 사기 탐지·예방 시스템 구축이 시급한 과제로 부상한다.

마지막으로, 국내 사이버 보험 시장의 성숙도다. 한국의 사이버 보험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대기업 중심의 가입 구조가 지배적이다. 미국에서 AI 신원 사칭 보장이 특약으로 추가되는 흐름은, 국내 보험사들이 딥페이크·보이스피싱 연동 리스크를 제도화된 보장 상품으로 흡수하는 방향을 선제적으로 검토해야 함을 시사한다. 중소기업과 금융 취약계층을 포괄하는 사이버 보험의 저변 확대 없이는, 리스크가 사회 전체에 무방비 상태로 축적될 수 있다.


  1. 결론: 사이버 리스크는 이제 거시 리스크다

166억 달러라는 숫자는 단순히 피해 규모가 커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사이버 범죄가 금융 시스템, 고령 인구, 암호화폐 인프라와 맞물려 거시적 리스크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보험산업의 대응이 보장 확대와 보장 압축을 동시에 추구하는 모순적 구조를 취하는 것은, 리스크의 불확실성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국 금융산업과 기업 모두, 이 전환의 신호를 경쟁력 재편의 계기로 삼아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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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이제 '관리 대상'이다 — 글로벌 AI 거버넌스의 새로운 기준선

AI를 잘 쓰는 기업보다, AI를 잘 통제하는 기업이 시장의 신뢰를 얻는 시대가 왔다.


영국 재무보고위원회(FRC)의 감사 가이드라인과 미국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공공조달 규정을 분석한 복수의 정책 브리핑에 따르면, 2025년을 전후해 AI 규제의 무게중심이 결정적으로 이동하고 있다. 개발 단계의 안전성 확보에 집중하던 초기 규제 논의에서 벗어나, 이제 각국 정부는 AI가 실제로 사용되는 현장 — 감사 업무, 공공 계약, 조달 절차 — 에서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1. 감사 현장에 들어온 규제: FRC의 AI 가이드라인

영국 FRC는 회계법인이 생성형·에이전트형 AI를 감사 업무에 활용할 경우, AI가 산출한 판단과 결과물까지 감사 책임 범위에 포함된다고 명시했다. AI는 단순한 효율화 도구가 아니라, 인간 감사인이 검토하고 통제해야 할 감독 대상으로 규정된 것이다. 독립성과 신뢰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사용이 허용된다는 조건은, 사실상 AI 활용의 상한선을 제도적으로 설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전문가 책임이 AI의 판단에 의해 희석될 수 없다는 원칙이 처음으로 감사 기준에 명문화된 사례다.

  1. 조달 시장의 진입 조건으로 부상한 AI 거버넌스: 캘리포니아의 선택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공공 조달에 참여하려는 기업에 AI 오남용 방지 체계 구축을 계약 조건으로 의무화했다. 불법 콘텐츠 생성 방지, 알고리즘 편향 통제, 시민권 침해 방지 등 내부 통제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공공 계약 자체가 차단된다. AI 생성 이미지와 영상에 대한 워터마크 의무화와 향후 도입 예정인 공급업체 인증 제도는, AI 거버넌스 수준이 기업의 시장 접근성을 좌우하는 경쟁 변수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1. 한국 기업에 주는 함의

두 사례의 공통점은 규제가 'AI 자체'가 아니라 'AI를 사용하는 조직의 책임 구조'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기업, 특히 글로벌 감사·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해외 공공 조달 시장에 진출하려는 기업은 이 변화를 기술 문제가 아닌 거버넌스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AI 도입 여부보다 AI 통제 체계의 완성도가 계약 수주와 신뢰 확보의 기준이 되는 시대가 이미 시작됐다. 국내에서도 금융감독원과 조달청 등 규제 기관이 유사한 방향으로 기준을 강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선제적 내부 통제 체계 정비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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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30일 월요일

데이터를 훔치고 협박하다 — 브랜드를 겨냥한 '사이버 공격'

나이키 데이터 유출 사태: 제조 기밀을 겨냥한 사이버 공격의 새로운 국면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가 대규모 사이버 공격으로 인해 전례 없는 보안 위기에 직면했다. 보안 업계의 추적 결과 이번 공격의 배후에는 '월드리크스(WorldLeaks)'라는 신생 해킹 조직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사건의 성격과 규모는 현대 기업이 마주한 사이버 위협의 질적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1. 랜섬웨어에서 '데이터 갈취'로 — 공격 방식의 전환

월드리크스는 과거 악명 높았던 랜섬웨어 조직 헌터스 인터내셔널(Hunters International)의 재브랜드화 그룹이거나 그 후계 조직일 것으로 보안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이들의 수법은 기존 랜섬웨어와 구별된다. 시스템을 암호화해 운영을 마비시키는 대신, 데이터를 선제적으로 탈취한 뒤 이를 공개하겠다고 위협하는 '데이터 중심 갈취' 방식을 택했다. 피해 기업 입장에서는 시스템 복구보다 데이터 확산 차단이 더 긴박한 과제가 되는 구조다.

  1. 유출 데이터의 실체 — 고객 정보가 아닌 제조 기밀

해커 측이 확보했다고 주장하는 데이터는 약 1.4TB, 파일 수로는 18만 8천여 개에 달한다. 다행히 현재까지의 조사에서 고객 결제 정보나 개인 민감정보의 대규모 유출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다. 문제는 오히려 그 반대편에 있다. 유출된 파일 디렉토리에는 여성 스포츠웨어, 남성 스포츠웨어, 공장 교육 리소스, 의류 제조 공정 등 제품 설계와 생산 기술의 핵심이 되는 내부 자료가 포함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 자료들이 외부로 유통될 경우 경쟁사에 설계 기밀이 넘어가거나 정교한 위조품 제작에 악용될 수 있어, 나이키의 브랜드 가치와 시장 지위에 장기적 손상이 불가피하다.

  1. 침투 경로 — 공급망이 뚫린 지점

조사 과정에서 이번 침해가 나이키 내부 핵심 시스템의 단일 취약점보다는 공급망 인프라의 패치되지 않은 연결 고리를 통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나이키와 연결된 수백 개의 제3자 공급업체, 물류 파트너, 소매업체 가운데 보안이 취약한 접점이 공격 통로가 된 것으로 보이며, 전문가들은 인증되지 않은 API 게이트웨이나 내부 파일 공유 시스템의 설정 오류가 결정적 원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이번 사태가 나이키 단독의 내부 보안 문제가 아닌, 글로벌 공급망 전체의 구조적 취약성에서 비롯된 사건임을 의미한다.

  1. 나이키의 대응과 현재 경과

나이키는 사건 발생 직후 소비자 프라이버시와 데이터 보안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사이버 보안 사고를 적극 조사 중이라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현재까지 구체적인 사실 관계나 피해 범위에 대한 추가 공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주목할 만한 정황은 따로 있다. 월드리크스의 다크웹 사이트에서 나이키 관련 데이터 목록이 일시적으로 삭제된 사실이 포착되면서, 보안 업계 일각에서는 나이키가 데이터 확산을 막기 위해 해커 측과 비공개 협상을 진행 중이거나 이미 대가를 지불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정밀 포렌식 조사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으며, 내부 설계 파일의 일부가 이미 유포되었을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고 있다.

  1. 한국 기업에 주는 함의

이번 사태는 한국 제조·공급망 기업에도 직접적인 시사점을 던진다. 나이키를 포함한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의 OEM·ODM 파트너로 참여하는 한국 의류·소재 기업들은 자사 시스템이 글로벌 공급망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잠재적 공격 진입점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해커들은 방어가 가장 취약한 연결 고리를 노린다. 대기업의 보안 수준이 아무리 높아도, 협력사의 API 설정 오류 하나가 전체 공급망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이번 사건의 교훈은 한국 중견·중소 제조기업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제3자 보안 감사, 접근 권한 최소화 원칙, 공급망 파트너 대상 보안 가이드라인 정비가 선택이 아닌 경영 필수 과제로 자리 잡아야 할 시점이다.


한 줄 인사이트: 이제 사이버 공격의 표적은 고객 데이터가 아닌 기업의 제조 기밀과 공급망 연결망이며, 가장 약한 협력사 하나가 글로벌 브랜드 전체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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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에서 증명으로 — 글로벌 그린워싱 압박과 한국 기업의 생존 조건

넷제로 선언 기업 96%에서 그린워싱 신호 — 한국 기업이 직면한 새로운 리스크

ASSET Impact가 최근 공개한 글로벌 넷제로 분석 보고서와 EY의 2024-2025 글로벌 기업 공시 설문조사는 기후 공시 분야에서 전례 없는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탄소 중립을 선언한 글로벌 주요 기업 중 96%에서 그린워싱(Greenwashing) 위험 신호가 하나 이상 포착되었으며, CFO의 96%는 ESG 데이터의 신뢰성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 수치들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글로벌 자본시장과 규제 당국이 동시에 기업의 기후 공약을 검증 대상으로 올리는 구조 전환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파장은 한국 기업에도 예외 없이 밀려오고 있다.

  1. 96%가 말하는 것: 선언과 실행 사이의 구조적 괴리

ASSET Impact 보고서가 드러낸 핵심은 넷제로 선언 자체의 허구성이 아니라, 선언과 실제 물리적 자산 운영 사이의 구조적 단절이다. 시가총액 기준 글로벌 주요 기업들의 탄소 감축 경로를 실제 공장·설비 배출 추산치와 비교한 결과, 압도적 다수의 기업에서 목표치와 실측치가 일치하지 않았다. 더 깊은 문제는 방법론에 있다. 많은 기업이 Scope 1·2 배출량만 집계하고 공급망 전반의 간접 배출인 Scope 3를 의도적으로 제외하거나, 실질적 감축 없이 탄소 배출권 구매(Offsetting)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방식으로 수치를 관리하고 있다. 이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회계적 조작이지, 실제 탈탄소와는 거리가 멀다.

  1. 투자자와 규제 당국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

EY 조사에서 투자자의 85%가 기업의 지속가능성 보고가 5년 전보다 더 기만적이라고 응답한 사실은 자본시장의 신뢰 붕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불신은 이미 구체적인 제도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EU는 2026년부터 소비자 권익 강화 지침(EmpCo Directive)을 통해 과학적 근거 없는 '친환경', '탄소 중립', '기후 긍정적' 등의 표현을 마케팅에 사용하는 것을 전면 금지한다. 동시에 ISSB(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 기준의 본격 적용은 기업에게 야심 찬 선언 대신 검증 가능한 이행 경로를 요구한다. 감축 목표, 중간 마일스톤, 전환 계획, 재무적 연계성까지 구체적으로 공시해야 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1. 한국 기업이 직면한 이중 압박

국내 기업 입장에서 이 흐름은 두 가지 경로로 동시에 압박을 가한다. 첫째는 수출 규제 리스크다. EU 공급망 실사 지침(CSDDD)과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맞물리면서, 유럽 시장에 납품하거나 진출한 한국 제조·수출 기업들은 자사 배출량뿐 아니라 공급망 전반의 탄소 데이터를 증빙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Scope 3를 누락한 넷제로 선언은 EU 바이어의 공급망 실사 심사에서 그대로 걸러질 수 있다. 둘째는 국내 자본시장의 압박이다. 한국 금융당국도 기후 관련 재무 정보 공시를 단계적으로 의무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국민연금 등 주요 기관투자자들의 ESG 스튜어드십 기준도 높아지고 있다. 형식적 공시와 실질적 이행 사이의 간극이 클수록, 투자 회수(Divestment) 압력과 법적 소송 위험도 함께 커진다.

  1. '증명'의 시대가 요구하는 전략적 전환

그린워싱 논란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설적으로 단순하다. 선언보다 이행을, 수사보다 데이터를 앞세우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 방향이 유효하다. 우선 탄소 회계의 범위를 Scope 3까지 확장하고, 이를 외부 검증 가능한 형태로 공시하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 다음으로 배출권 구매에 의존하는 단기 수치 관리를 줄이고, 실제 설비·공정 전환에 기반한 감축 경로를 수립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ISSB 및 TCFD 기준에 맞춰 전환 계획(Transition Plan)을 재무 전략과 연계하여 공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2026년은 그린워싱의 노이즈가 걷히고, 실제 이행력을 갖춘 기업만이 글로벌 공급망과 자본시장에서 신뢰를 유지할 수 있는 분기점이다.

한 줄 인사이트: 넷제로 선언은 더 이상 면죄부가 아니다 — 검증되지 않은 기후 공약은 이제 기업 리스크의 새로운 진원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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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디슨이 '검증된 넷제로'를 고집하는 이유: 친환경 호텔의 새로운 기준

넷제로 호텔의 부상: 래디슨의 실험이 국내 호텔 업계에 던지는 질문

  1. 선언을 넘어 검증으로: 래디슨의 넷제로 전략

글로벌 호텔 체인 래디슨 호텔 그룹이 2030년까지 '검증된 넷제로 호텔(Verified Net-Zero Hotel, VNZ)' 100개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2026년 국제호텔투자포럼(IHIF)에서 공식화했다. 이 계획이 기존의 친환경 선언과 다른 점은 단어 하나에 있다. '검증된(Verified)'이다.

래디슨은 재생에너지 100% 전환, 저탄소 식음료 메뉴 도입, 폐기물 제로 운영이라는 구체적 실행 기준을 설정하고, 독일 TÜV 라인란트의 제3자 독립 검증을 통해 투명성을 확보하는 구조를 택했다. 탄소 감축 범위도 Scope 1·2에 그치지 않고 공급망과 고객 행동을 포함하는 Scope 3까지 아우르며, SBTi(과학기반감축목표이니셔티브) 기준을 적용한다. 영국 맨체스터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의 시범 운영을 거쳐 2026년부터 북유럽과 영국, 남아공으로 확산할 예정이다.

  1. 20%의 시장: 친환경 소비층은 실재하는가

래디슨 CEO가 공개한 수치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예약 고객의 20%가 넷제로 인증을 숙박 선택의 결정적 이유로 꼽았다는 점이다. 이는 친환경 소비가 단순한 이미지 마케팅이 아니라 실질적인 수요 세분화 기준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호텔 산업에서 20%는 작지 않은 비중이다. 이 고객층은 대체로 높은 지불 의향을 가진 비즈니스 여행자이거나, ESG 기준으로 출장 숙소를 선정하는 기업 고객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유럽 기업들은 ESG 보고 의무화에 따라 임직원의 출장 탄소 발자국을 공시 항목에 포함시키기 시작했으며, 이는 호텔 선택 기준을 직접적으로 바꾸고 있다. 래디슨의 VNZ 프로그램은 이 수요를 선점하기 위한 포지셔닝이기도 하다.

  1. 국내 호텔 업계의 현재: 인증과 실행 사이의 간극

국내 호텔 업계도 변화의 흐름을 인식하고 있다. 호텔신라를 비롯한 주요 체인들이 Green Key 등 국제 친환경 인증 취득에 나서고 있으며, 탄소 저감 목표를 공식 선언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그러나 래디슨 사례와 비교할 때 국내 현황은 두 가지 측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첫째는 검증 체계의 부재다. 국내 친환경 인증은 대부분 에너지 절감이나 운영 개선 수준에 머물며, Scope 3를 포함한 전 과정 탄소 감축을 독립 기관이 검증하는 구조는 아직 일반화되어 있지 않다. 둘째는 수요 기반의 차이다. 국내 호텔 시장의 주요 고객층은 아직 친환경 인증을 숙박 선택의 핵심 기준으로 삼는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현재의 이야기다. EU의 CSDDD(공급망 실사지침)가 본격화되면, 유럽 기업과 거래하는 국내 기업 고객들의 출장 기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1. 규제 압력과 선제 대응: 국내 호텔의 전략적 선택

래디슨의 VNZ 프로그램이 북유럽과 영국을 1차 확산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 지역은 탄소 규제 수준이 가장 높고, 기업 고객의 ESG 요구가 실질적인 구매 결정으로 이어지는 시장이다. 래디슨은 규제가 강한 곳에서 먼저 기준을 세우고, 그 신뢰를 다른 시장으로 이전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국내 호텔 업계에 시사하는 점은 분명하다. 현재 한국 시장에서 넷제로 인증이 직접적인 매출 레버가 되지 않더라도, 해외 법인 고객이나 글로벌 컨퍼런스 유치 시장에서는 이미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파르나스 등 서울 주요 MICE 호텔들이 글로벌 기업 행사를 유치하려면, 머지않아 탄소 감축 검증 여부가 입찰 조건에 포함될 수 있다. 선택이 아닌 자격 요건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1. '검증'이 새로운 경쟁력이 되는 시대

래디슨의 실험이 한국 호텔 업계에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로 수렴한다. 친환경 경영을 선언의 언어로 다룰 것인가, 아니면 검증 가능한 운영 기준으로 내재화할 것인가.

탄소 규제가 강화되고 기업 고객의 ESG 요구가 구체화될수록, '검증된 친환경'과 '선언된 친환경' 사이의 간극은 시장 평가에 그대로 반영될 것이다. 국내 호텔 업계가 지금 준비해야 할 것은 새로운 인증 하나가 아니라, 전 과정 탄소 감축을 투명하게 입증할 수 있는 운영 체계 자체다.

한 줄 인사이트: 넷제로 호텔의 진짜 경쟁력은 탄소 감축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제3자가 검증할 수 있다는 투명성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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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9일 일요일

중앙에서 분산으로 — AI가 바꾸는 전력 산업의 문법

전력망을 기다리는 자와 전력망 밖으로 나선 자 — AI 시대의 에너지 경쟁은 이미 이 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국내 ESG·에너지 전문 매체 임팩트온은 생성형 AI 확산이 촉발한 전력 수급 위기와 이에 대응하는 데이터센터 업계의 구조적 전환을 최근 보도했다. 미국 현장에서 이미 가시화되고 있는 이 변화는, 에너지 산업 전체의 작동 원리가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1. 전력망 중심 시대의 균열

지난 100여 년간 전력 산업의 구조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대형 발전소가 전기를 만들고, 광역 송전망이 운반하며, 수용가는 그것을 소비했다. 중앙집중형 에너지 체계는 규모의 경제와 안정적 공급이라는 두 가지 강점을 바탕으로 현대 산업 문명의 기반이 되었다.

그런데 생성형 AI의 폭발적 확산이 이 구조에 균열을 내고 있다. 전력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는데, 변압기·전압조정기 등 전력망 핵심 설비의 납기는 수년 단위다. 데이터센터 증설, 제조업 리쇼어링, 전기화 수요가 동시에 몰리면서 전력망 확장 자체가 병목이 됐다. 이제 전력 부족은 수요 관리의 문제가 아니라 인프라 공급의 구조적 한계로 성격이 바뀌었다.

2. 데이터센터, 전력망 바깥으로 나서다

미국의 크루소에너지(Crusoe Energy)는 이 한계를 정면 돌파하는 방식을 택했다. 네바다주에서 태양광과 전기차 폐배터리를 결합한 마이크로그리드로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며, 전력망 의존 없이 독자적 전력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나아가 며칠 단위 저장이 가능한 철-공기(iron-air) 배터리 도입을 추진 중이다.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데이터센터는 기상 조건이나 계통 상황과 무관하게 자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 선택이 아니다. 전력망의 '수용자'였던 데이터센터가 독자적 에너지 시스템의 '운영자'로 전환되는 것이며, 분산형 전력 구조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변화다.

3. 에너지 산업의 문법이 바뀐다

전력 장비 공급망에도 같은 흐름이 나타난다. 브라질 TSEA 에너지가 미국 내 현지 생산 거점을 구축하는 것처럼, 수입 중심이던 전력 설비 조달도 탈중앙화·현지화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다.

결국 이 모든 변화가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다. 발전-송전-소비로 이어지는 수직적 에너지 체계가 느슨해지고, 수요 지점에서 스스로 발전하고 저장하는 분산형 구조가 그 자리를 채워가고 있다. AI 경쟁이 심화될수록 전력 자립 능력은 운영 효율의 문제를 넘어 산업 경쟁력의 핵심 변수가 된다. 어떤 기업이, 어떤 국가가 이 전환을 먼저 내재화하느냐가 AI 인프라 주도권을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다.

출처: 임팩트온(IMPACT ON), 홍명표 기자, 2026년 3월 27일 (원문: https://www.impacton.net/news/articleView.html?idxno=18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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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는 비용이 아니다: 유럽 선도 기업들이 증명하는 지속가능 수익 모델

ESG 선도 기업들은 규제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들은 이미 지속가능성으로 시장의 문법을 다시 쓰고 있다.


1. 역풍 속의 역주행

규제 완화의 바람이 대서양 양안을 가로지르고 있다. 미국에서는 파리협정 재탈퇴와 ESG 관련 행정명령이 잇따르고, 유럽 내에서도 지속가능성 공시 규제의 속도 조절론이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주요 기업들은 이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 정치적 불확실성을 뒤로하고, 오히려 지속가능 경영을 핵심 수익 전략으로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코퍼레이트 나이츠(Corporate Knights)가 발표한 '2026 유럽 50대 지속가능 기업' 리스트는 이 흐름을 수치로 확인해준다. 선정 기업들의 2024년 기준 총매출은 1조 2,000억 달러에 달하며, 전체 매출 중 지속가능 제품 및 서비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56%에 이른다. ESG는 이미 보고서 속 언어가 아니라, 실질적인 매출 구조로 정착해 있다.


2. 전환의 완결: ERG의 사례

리스트 1위를 차지한 이탈리아의 ERG는 에너지 전환의 가장 완결된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 기업은 화석연료 자산 일체를 매각하고 풍력·태양광 중심 기업으로 사업 구조를 전면 재편했다. 2022년부터 2024년 사이 발전량이 40% 증가했으며, 구글과의 20년 장기 전력구매계약(PPA) 체결을 통해 안정적인 수익 기반을 확보했다.

ERG의 사례가 주목받는 것은 단순한 친환경 이미지 제고 차원이 아니라, 사업 모델 자체를 지속가능 에너지 공급으로 재정의했다는 점에 있다. 고객인 구글 역시 장기 재생에너지 공급처를 필요로 했고, 두 기업의 이해관계는 정확히 맞물렸다. 지속가능성이 거래 구조를 설계하는 시대가 왔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3. 100%의 의미: 노보네시스와 인디텍스

덴마크의 노보네시스(4위)는 미생물·효소 기반 솔루션으로 석유화학 소재를 대체하는 사업을 영위하며, 전체 매출의 100%가 지속가능 매출로 분류된다. 사업의 본질 자체가 지속가능성인 기업이다. 이는 ESG를 주력 사업에 '접목'한 것이 아니라, ESG로부터 사업을 '구성'한 접근의 결과다.

패션 대기업 인디텍스(자라 모기업, 16위)의 사례는 또 다른 방식의 전환을 보여준다. 저영향 소재 사용 비중이 73%에 달하며, 지속가능 매출 성장률은 121.5%를 기록했다. 패션 산업은 오랫동안 지속가능성 논의에서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인디텍스의 수치는 대규모 공급망을 보유한 패션 기업도 구조적 전환을 통해 ESG를 성장 동력으로 삼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4. 순환경제와 금융의 합류

터키의 아르첼릭(23위)은 리퍼브(재생) 제품 판매량을 2배로 늘리며 순환경제 모델을 유럽 전역에서 수익화하고 있다. 가전제품의 수명을 연장하고 이를 재판매하는 방식이 비용 절감 차원을 넘어 독립적인 사업 모델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은 제조업의 ESG 전환 방향을 시사한다.

독일의 주거기업 보노비아(32위)는 에너지 효율 주택이라는 개념을 ESG 수익 모델로 구현했다. 에너지 소비 감소와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를 주거 서비스의 핵심 가치로 제시하며 시장을 재정의하고 있다.

금융 부문에서는 BNP파리바(40위)가 저탄소 금융 규모를 41조 원에서 56조 원으로 확대하며 지속가능 매출 성장률 94.7%를 기록했다. 금융기관이 저탄소 전환을 단순 리스크 관리 차원이 아닌 성장 전략으로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5. 시장을 설계하는 기업들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정책 변화에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규제가 완화되어도, 또는 정치적 불확실성이 고조되어도, 이들은 이미 지속가능성을 수익의 문법으로 내면화했다. 그 결과, 이들은 시장의 변화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직접 설계하는 주체가 되고 있다.

ERG가 구글에 재생에너지를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하는 순간, 시장의 표준이 이동한다. 노보네시스가 석유화학 소재를 대체하는 순간, 경쟁 지형이 달라진다. 인디텍스가 대규모 공급망을 저영향 소재 중심으로 재편하는 순간, 업계 전반의 조달 기준이 바뀐다. 이처럼 선도 기업의 전략적 선택은 개별 기업의 실적을 넘어 산업의 방향을 규정한다.


6. 한국 기업에 대한 함의

한국 기업들은 현재 ESG 공시 의무화와 글로벌 공급망 실사 요구에 직면해 있다. 이를 규제 대응 과제로 접근할 것인지, 아니면 수익 구조 재편의 기회로 접근할 것인지는 전략의 문제다. 유럽 선도 기업들의 경험은 후자의 방향이 실질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수치로 입증하고 있다. 지속가능성을 비용 항목이 아닌 매출 항목으로 재분류하는 사고의 전환이 지금 한국 기업에 요구되는 출발점이다.


출처 Corporate Knights, 2026 Europe's Most Sustainable Corporations,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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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선우 "중대성 이슈의 함정…기업은 왜 ‘진짜’ 리스크를 못 볼까?"

중대성 이슈는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탐지의 레이더다—공시 밖에서 부상하는 리스크를 먼저 읽는 기업이 지속가능경영의 주도권을 갖는다.


기업이 보는 리스크, 기업이 못 보는 리스크 중대성 이슈 프레임의 경계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임팩트온(IMPACT ON)의 송선우 리서치센터장은 최근 분석 기사를 통해 ESG 경영의 핵심 맹점 하나를 정면으로 짚었다. 제목은 "중대성 이슈의 함정…기업은 왜 '진짜' 리스크를 못볼까?"이다. 송 센터장은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에서 지속가능경영과 재생에너지를 전공했으며, 네이버 E커머스 ESG 전략 세미나, SK경영경제연구소 탄소중립 사례연구 등 국내 주요 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글로벌 ESG 프레임워크와 공시 트렌드를 분석해온 연구자다. 이번 글은 그가 오랫동안 현장에서 축적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쓴 것으로, 지속가능경영의 실효성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1. 공시 프레임이 만든 터널시야

기업의 ESG 실무는 오늘날 '중대성 평가(Materiality Assessment)'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어떤 이슈가 사업에 중요하고 이해관계자에게 유의미한지를 사전에 식별하고, 그 결과를 공시에 반영하는 구조다. 문제는 이 과정이 점차 공시 기준 충족을 위한 형식적 절차로 고착되고 있다는 점이다. 송 센터장은 이를 '터널시야'로 표현한다. 정해진 항목을 성실히 관리하는 동안, 사업 현장에서 실제로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리스크는 시야 밖으로 밀려난다.

세계지속가능발전기업협의회(WBCSD) 역시 같은 문제를 지적한다. 중대성 이슈는 고정된 체크리스트가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사업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업데이트되어야 할 동적 의제다. 이미 공인된 이슈를 관리하는 것과,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잠재 리스크를 포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역량이다.

2. AI가 확장하는 리스크의 지형

기술 변화는 중대성 이슈의 경계를 빠르게 넓히고 있다. 인공지능(AI)이 대표적이다. 초기에는 개인정보보호와 알고리즘 윤리가 주된 논의였다. 그러나 AI가 실제 서비스와 의사결정에 깊숙이 적용되면서 리스크의 성격도 달라졌다. 차별적 알고리즘이 특정 계층을 배제하는 구체적 피해 사례가 나타났고, 더 나아가 AI 인프라 자체가 새로운 리스크 원천으로 부상하고 있다. 대규모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와 냉각 수자원 사용, 그리고 그로 인한 인근 지역사회의 부담은 이제 물리적·사회적 ESG 리스크의 의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OECD는 이 맥락에서 규제 기준의 사후적 준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기술이 사회에 미칠 잠재적 영향을 설계 단계부터, 즉 규제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선제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3. 글로벌 선도 기업의 대응 방식

글로벌 주요 기업들은 이미 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세일즈포스(Salesforce)는 AI 윤리 전담 조직을 운영하며, AI 시스템의 개발부터 배포까지 전 과정에 내부 통제 장치를 내재화했다. 애플(Apple)은 'Privacy by Design'이라는 원칙 아래 개인정보보호를 제품 설계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공통점은 분명하다. 이들은 공시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리스크를 사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을 구성하는 단계에서 리스크를 통합적으로 고려한다.

4. 국내 기업이 간과하는 두 가지 전환 리스크

송 센터장이 특히 우려하는 것은 국내 기업들이 아직 충분히 주목하지 않는 두 가지 잠재 리스크다. 첫째는 공정전환(Just Transition)이다. 산업 구조가 저탄소 경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노동자, 협력업체, 지역사회가 받는 충격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것은 단순한 사회 공헌의 영역이 아니라, 사업 연속성과 공급망 안정성에 직결되는 경영 리스크다.

둘째는 AI 노동전환이다. 한국은행은 국내 취업자의 약 12%가 AI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국내 기업 담론은 생산성 향상과 AI 도입의 편익에 집중되어 있을 뿐, 이 전환이 노동시장과 사회 전반에 미칠 영향에 대한 준비는 여전히 미흡하다. 반면 아마존(Amazon)은 'Future Ready 2030' 프로그램을 통해 대규모 인력 재교육과 직무 전환 투자를 진행 중이다. 이는 단순한 기업 이미지 관리가 아니라, 노동력 확보와 사회적 신뢰 유지를 위한 전략적 투자로 읽힌다.

5. 지속가능경영의 진짜 경쟁력

이 글이 말하는 핵심은 결국 하나다. 정해진 중대성 이슈를 성실히 관리하는 것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다. 아직 주류 의제로 자리 잡지 않았더라도, 향후 사업 모델과 고용 구조, 지역사회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리스크를 남들보다 빠르게 감지하고 경영 의제로 전환하는 능력—이것이 지속가능경영의 진정한 경쟁력이 되고 있다. 공시는 그 결과를 보고하는 창구일 뿐, 경영의 출발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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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8일 토요일

공학자에서 철학로 변신한 다사카 히로시의 『인간력』

 

기술 문명의 최전선에서 원전 사고를 직접 수습한 공학자가 인간력을 논하는 이유는, 극한의 위기에서 시스템을 지탱하는 최후의 변수가 인간 그 자체임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았기 때문이다.


3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전. 창밖으로 봄볕이 넉넉하게 쏟아지는 날이다. 도서관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가방에서 한 권의 책을 꺼냈다. 다사카 히로시(田坂広志)의 『인간력(人間を磨く)』. 바쁜 평일이 지나고 맞이하는 이런 오전은, 묵직한 책 한 권을 천천히 읽기에 더할 나위 없는 시간이다.

  1. 그는 누구인가 — 공학자에서 사상가로

다사카 히로시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도쿄대학교에서 원자력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공학자였다. 졸업 후 미쓰비시금속 원자력사업부에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 프로젝트에 종사했고, 이후 미국 싱크탱크 배텔기념연구소와 퍼시픽노스웨스트 국립연구소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궤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1990년 일본종합연구소 설립에 참여하며 경영 전략과 사회 기업가론의 세계로 발을 옮겼고, 2000년에는 다마대학원 교수로 부임하면서 사상가이자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본격화했다. 같은 해 싱크탱크 소피아뱅크를 설립하고, 세계경제포럼(다보스 회의) 글로벌어젠다카운슬 위원, 세계 현인회의 부다페스트클럽 일본 대표를 역임하며 글로벌 지성의 무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였다. 원자력공학의 전문가로서 그는 간 나오토 총리 내각의 내각관방참여로 취임하여 원전 사고 수습과 원자력 행정 개혁에 직접 나섰다. 20년 전 원자력 분야를 떠난 그가 가장 극한의 현장에서 다시 그 책임과 마주한 것이다. 이 경험은 그의 사유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났을 때, 남는 것은 결국 인간 그 자체의 품격과 역량이라는 인식이었다.

이후 그는 전국의 경영자와 리더 8,600여 명이 모인 사숙(私塾) '다사카 주쿠'를 창설하고, 100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21세기 리더에게 필요한 지성의 본질을 탐구해왔다. 원자력 공학자가 인간과 사회를 사유하는 철학자로 변신한 것이 아니라, 기술과 현실의 최전선을 두루 거친 사람이 마침내 가장 근원적인 물음 — 인간이란 무엇인가 — 에 도달한 것이다.

  1. 『인간력』이 전하는 메시지 — 지식이 아닌 수련으로

다사카 히로시의 저작 세계에서 『인간력(人間を磨く)』은 그가 일관되게 강조해온 '7가지 지성' — 사상, 비전, 뜻(志), 전략, 전술, 기술, 인간력 — 의 최종 단계에 해당하는 책이다. 아무리 탁월한 전략과 기술을 갖추었더라도, 그것을 현실에서 작동하게 하는 것은 결국 인간 관계를 이끌고 신뢰를 형성하는 인간력이라는 것이 그의 핵심 명제다.

그렇다면 인간력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인간력을 '이상적 인간상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일상의 인간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실천하는 '마음의 수련(こころの技法)'으로 정의한다. 고전을 읽는 것만으로는 인간력이 길러지지 않는다. 고전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지, 어떻게 수련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련의 장은 다름 아닌 매일의 직장과 생활 속 인간 관계다.

책에서 제시하는 7가지 마음의 기법은 단순하면서도 깊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결점을 자각하고 주변에 감사하는 것, 아무리 얽힌 인간 관계라도 화해의 여지를 남기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자기 정당화와 자기 방어라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의식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자기 불신과 타자에 대한 불안이 자기 방어를 낳고, 그것이 관계를 꼬이게 만든다는 진단은, 조직과 리더십의 실패를 오랫동안 목격해온 저자의 경험에서 나온 통찰이다.

또한 저자는 인간이 단일한 인격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님을 강조한다. 우리 안에는 복수의 '자아'가 공존하며, 그 가운데 가장 현명한 자아를 어떤 상황에서도 불러낼 수 있는 능력이 진정한 인간력이라는 것이다. 이는 AI 시대에 더욱 설득력 있는 메시지다. 기계가 지식과 논리를 대체하는 시대에, 인간에게 남는 고유한 역량은 결국 이 '내면의 수련'에서 나온다.

봄볕이 좋은 오전, 도서관 창가에서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생각이 오래 머물렀다. 원자력 공학자가 인간의 품격을 논하는 책을 쓰게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다. 기술이 가장 위험해지는 순간, 인간을 구하는 것은 또 다른 기술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의 깊이라는 사실을 그는 현장에서 직접 배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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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7일 금요일

설계가 곧 책임이다: 미국 법원이 바꾼 빅테크의 책임 기준

플랫폼의 책임은 이제 '무엇을 보여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게 만들었는가'에서 시작된다.


1. 첫 번째 균열

2025년, 미국 법원이 처음으로 소셜미디어 중독 피해에 대한 플랫폼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캘리포니아 LA 배심원단은 메타(인스타그램)와 구글(유튜브)에 총 600만 달러(약 90억 원)의 배상을 명령했다. 청소년의 우울·불안 유발에 플랫폼이 직접적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 첫 사례다. 하루 전날에는 뉴멕시코 법원이 메타에 3억 7,500만 달러의 배상을 명령했다. 단발적 판결이 아니라,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다.

2. 쟁점의 이동: 콘텐츠에서 설계로

이번 판결에서 가장 주목할 지점은 법원이 무엇을 문제 삼았는가에 있다. 법원은 플랫폼이 유통한 콘텐츠 자체가 아니라, 플랫폼의 구조적 설계—무한 스크롤, 자동재생, 반복 알림—를 중독 유발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는 미국 빅테크가 오랫동안 방패로 삼아온 통신품위법 230조(Section 230)의 논리를 정면으로 우회하는 판단이다. 230조는 "플랫폼은 이용자가 게시한 콘텐츠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면책 조항이다. 그러나 법원은 이번에 콘텐츠가 아닌 설계를 문제 삼음으로써, 기존의 법적 방어선을 무력화했다. 플랫폼이 어떤 콘텐츠를 호스팅했느냐가 아니라, 이용자의 행동을 어떻게 유도하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느냐가 이제 쟁점이 되는 것이다.

3. 내부 문건이 드러낸 의도

재판 과정에서 공개된 메타 내부 문건은 이 판단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근거가 됐다. 문건에는 더 어린 이용자를 플랫폼에 유입시키고 이들을 장기 이용자로 전환하려는 전략이 담겨 있었다. 기업 측은 "청소년 정신건강 문제는 복합적 원인에서 비롯된다"며 인과관계를 부인했으나, 법원은 설계 의도 자체에 책임을 물었다. 결과가 의도적이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설계된 구조가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판단하는 방향으로 기준이 옮겨간 것이다.

4. 구조화되는 법적 리스크

현재 미국 전역에서 유사한 소송이 약 2,000건 진행 중이다. 이번 판결은 이 소송들의 향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선례로 작용한다. 개별 소송이 집단소송 형태로 통합·확산되면서, 빅테크가 직면하는 법적 리스크는 더 이상 개별 사건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 구조 전반에 걸친 시스템 리스크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

플랫폼을 단순 중개자(conduit)로 보던 시각이 제품 설계자(product designer)로 전환되는 이 흐름은, 규제 프레임과 소송 전략 모두를 근본적으로 재편할 것이다. 향후 입법 논의에서도 230조 개정 압력이 한층 강해질 가능성이 높다.

5. 한국 기업에의 시사점

이 판결의 파장은 미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내 플랫폼 기업들도 알고리즘 설계, 추천 시스템, 사용자 체류 시간 극대화 전략에 대한 법적·윤리적 검토를 본격화해야 할 시점에 직면해 있다. 한국에서도 청소년 디지털 이용 환경에 대한 규제 논의가 진행 중이며, 미국 판례의 논리는 국내 입법 및 소송 환경에도 점진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설계 책임'이라는 새로운 기준은 플랫폼 기업 전반에 걸쳐 제품 개발 단계에서의 리스크 평가를 새로운 필수 과제로 만들고 있다.


📎 출처 본 포스트는 미국 LA 배심원단의 메타·구글 소셜미디어 중독 배상 판결(2025) 및 뉴멕시코 법원의 메타 배상 명령 관련 보도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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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경영의 좌표를 다시 묻다 — 한국 ESG 논의를 한 단계 끌어올릴 신간 두 권

ESG의 실행력은 체크리스트가 아니라 좌표에서 나온다 — 목표의 언어(SDG)와 정신의 뿌리(K-ESG)를 함께 갖출 때 비로소 경영은 방향을 얻는다.


1. 왜 지금, 책인가

ESG는 이제 낯선 개념이 아니다. 공시 의무화, 공급망 실사, 기후 소송 — 이 모든 흐름이 기업 경영의 전면에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러나 현장에서 ESG를 실행하는 경영자와 실무자들이 종종 토로하는 것은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좌표의 부재다. 무엇을 위해, 어떤 철학으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체크리스트와 공시 템플릿이 답해주지 못하는 질문들이다. 최근 출간된 두 권의 책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박창수의 『SDG와 ESG』와 고문현의 『오래된 미래에서 찾은 K-ESG의 정석』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ESG 경영의 사상적·실천적 좌표를 제시한다.


2. 『SDG와 ESG』 — 목표와 실행을 잇는 통합 언어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단순하지만 묵직하다. SDG(지속가능발전목표)는 인류가 합의한 방향이고, ESG는 기업이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실행 언어라는 것이다. 두 체계는 별개의 프레임이 아니라 하나의 지속가능성 전환을 구성하는 두 축이다.

저자 박창수는 공직 경력과 정책 연구를 바탕으로 이 통합의 논리를 구체화한다. 책은 SDG 17개 목표를 ESG의 환경·사회·지배구조 요소와 체계적으로 매핑하고, GRI·TCFD 등 국제 보고 표준이 SDG 이행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정부, 기업, NGO의 실제 사례가 함께 제시되어 이론과 현장 사이의 간격을 좁힌다.

한국의 탄소중립 전략과 포용성장 논의를 SDG-ESG 통합 프레임 안에서 재배치하는 대목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국내 정책 환경과 글로벌 규범 체계를 연결하는 작업은 실무자들이 자신의 업무를 더 넓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지속가능성은 선택지가 아니라 이미 생존의 언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려면 SDG와 ESG를 함께 읽어야 한다.


3. 『오래된 미래에서 찾은 K-ESG의 정석』 — 철학 없는 ESG는 지속되지 않는다

고문현의 책은 다른 질문에서 출발한다. 한국의 기업들이 ESG를 열심히 실행하고 있다면, 그 ESG는 어디서 온 것인가. 서구에서 설계된 프레임을 도입하고 적용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저자의 답은 단호하다. K-ESG는 단순한 글로벌 스탠더드의 한국어 버전이 아니라, 한국 고유의 사상적 토양에서 길어 올린 독자적 모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효의 화쟁 사상, 동학의 인내천, 이순신의 애민 정신 — 이 전통적 가치들을 ESG의 철학적 기반으로 재해석하는 시도는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논리는 일관되다. 철학적 뿌리 없는 ESG는 규제 대응에 그칠 뿐, 조직 문화와 경영 전략의 DNA로 자리 잡지 못한다.

국내 최초 환경헌법 박사이자 2024년 헌법재판소 기후소송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저자의 이력은 이 주장에 무게를 더한다. 책은 대기업 ESG 노하우의 중소기업 확산 전략도 다루며, K-ESG를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라는 실무적 물음에도 응답한다. AI 시대에 생명 중심의 문화적 감수성이 한국의 ESG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전망 또한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4. 두 책이 함께 제기하는 질문

두 책은 접근 방식이 다르지만 공통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ESG를 진정한 전환의 도구로 만들기 위해서는 체계(SDG와의 통합)와 철학(한국적 정체성)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는 글로벌 목표와 실행 프레임의 정합성을 묻고, 다른 하나는 실행의 정신적 기반을 묻는다. 이 두 질문은 사실 하나의 더 근본적인 물음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왜 ESG를 하는가.

기후위기의 긴박성, 1.5℃ 임계점, 글로벌 공급망 재편 — 외부 압력은 이미 충분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압력에 반응하는 ESG가 아니라, 방향을 가진 ESG다. 두 책은 그 방향을 탐색하는 데 있어 진지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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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6일 목요일

사이클론이 흔드는 세계 원자재 공급망 — 호주 필바라의 구조적 취약성

공급망의 취약성은 설비가 아니라 경로의 단일성에 있다 — 호주 필바라는 세계 원자재 시장이 얼마나 좁은 병목 위에 서 있는지를 반복해서 증명하고 있다.


블룸버그가 최근 보도한 바와 같이, 호주 서부 해안에 접근 중인 열대성 사이클론 '나렐(Narelle)'이 글로벌 원자재 시장에 다시 한번 경보음을 울리고 있다. 사이클론의 직접적인 위협 대상은 기상 관측소가 아니라 포트헤들랜드(Port Hedland)와 댐피어(Dampier)라는 두 개의 항만이다. 이 두 거점이 동시에 작동을 멈출 경우, 세계 LNG 공급의 약 20%와 철광석 수출의 절반 이상이 일시에 차단될 수 있다.

1. 문제의 핵심은 생산이 아니라 항만이다

호주 북서부 필바라(Pilbara) 지역은 세계 최대 규모의 철광석·LNG 수출 거점이다. 그러나 이 지역이 지닌 근본적인 취약성은 생산 설비의 견고함이 아니라 물류 경로의 단일성에서 비롯된다. 필바라에는 사실상 대체 선적 경로가 존재하지 않는다. 항만이 멈추면 수출이 즉각 멈춘다. 이번 사이클론 접근에 따라 두 항만 모두 선박 대피 절차에 들어간 상태이며, 조업 정상화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주요 위험도 설비 파손보다는 생산 중단과 선적 지연에 있다. 물리적 파괴보다 시간의 공백이 더 크게 작동하는 구조다.

2. 아시아 수요국의 연쇄 충격

이 문제는 호주 내부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국은 LNG 수입의 약 25%를 호주에 의존하고 있으며, 일본의 전력·도시가스 부문도 호주산 비중이 높다. 선적이 지연될 경우 양국은 현물 시장(스팟 마켓)에서 추가 물량을 조달해야 하고, 이는 JKM(Japan Korea Marker) 가격의 단기 상승 압력으로 직결된다. 사이클론이 단순한 기상 이벤트가 아니라 에너지 안보 변수로 작동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전례는 이미 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월 사이클론 '젤리아(Zelia)'가 동일 해역에 접근했을 당시, 철광석 선물 가격은 단기간에 10% 이상 급등했다. LNG 역시 사이클론 관련 공급 우려가 제기될 때마다 JKM이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시장은 이미 이 경로를 학습했고, 나렐의 접근만으로도 가격 변동이 선제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리오틴토(Rio Tinto)의 보크사이트·망간 광산 일부가 이미 일시 중단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충격이 현실화하는 속도를 보여준다.

4. 충격의 전파 경로

원자재 시장의 충격은 단선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철광석 가격 변동은 통상 2~3주의 시차를 두고 철강 가격에 반영된다. LNG 선적 지연은 전력·열에너지 비용으로 이어지며, 산업 생산 전반에 파급된다. 단일 사이클론이 철광석 → 철강 → 에너지 → 제조업 원가로 이어지는 연쇄 고리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기후 변수 하나가 글로벌 공급망 전체를 흔드는 이 구조는, 이번에도 변함없이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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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5일 수요일

AI 시대의 자본 집중과 민주적 투자 접근성: 래리 핑크의 경고

블랙록의 래리 핑크 CEO가 2026년 연례 주주 서한을 통해 AI 투자 소외 계층의 경제적 위험성과 자본주의 구조의 불균형 심화 가능성을 정면으로 경고했다. 연합인포맥스가 3월 24일 보도한 이 서한의 내용은, 단순한 투자 조언의 차원을 넘어 AI가 촉발할 구조적 불평등 문제를 자본시장의 언어로 진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핵심 논점을 살펴본다.


1. 투자하지 않는 자의 위험

핑크 CEO는 이번 서한에서 자본시장 참여를 장기적 재정 안전의 핵심 경로로 규정했다. 지난 20년간 S&P500 지수가 약 8배 이상 상승한 사실을 근거로, AI를 비롯한 혁신 분야에 투자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명확한 기회비용이 발생한다는 논리다. 이는 단순한 투자 조언이 아니라, 자산 보유 여부가 곧 미래 번영의 구조적 조건임을 선언한 것에 가깝다.

2. AI, 불평등의 가속기가 될 수 있다

핑크 CEO는 AI가 기존 자본주의의 불균등 분배 패턴을 "훨씬 더 큰 규모로 반복할 위험이 있다"고 진단했다. 자본 소득과 노동 소득 사이의 오래된 격차가 AI 시대에 더욱 가파르게 벌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아마존, 알파벳,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 수천억 달러를 투자하는 빅테크 기업들이 AI 인프라 구축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프로젝트에 자금을 조달하고 수익을 공유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기업과 기관 투자자에게 부가 집중되는 구조는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핑크 CEO는 이 소유권의 집중이 "민주적으로 구성된 정부 체제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고까지 언급하며, 경제 문제를 정치적 안정성의 문제로 확장했다.

3. 해법: 투자 접근성의 민주화

핑크 CEO가 제시하는 해법의 핵심은 투자 참여 기회의 구조적 확장이다. 투자 기회의 토큰화, 그리고 사회보장제도가 연기금 방식으로 운용되도록 하는 제도적 설계를 통해 더 많은 시민이 경제 성장의 과실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이를 사회보장의 민영화와 명확히 구분하며, "시민들이 국가 성장에 투자하고 그 보상을 공유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밝혔다. 투자를 자산가만의 특권이 아닌, 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구조로 재편하자는 문제의식이다.

4. 한국적 맥락에서 읽기

핑크의 경고는 한국 사회에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공적 연기금이 AI 인프라와 글로벌 자본시장에 어떤 전략적 포지셔닝을 취해야 하는지, 그리고 개인 투자자와 중소 기업이 AI 성장 과실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정책적 의제다. AI가 만들어내는 부가 소수의 생태계 안에 갇히지 않도록 설계하는 일은 시장의 문제이기 이전에 사회 설계의 문제다.

한 줄 인사이트

AI 시대의 진짜 위험은 기술 격차가 아니라, 그 기술이 창출하는 부에 접근하지 못하는 소유 격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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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3일 월요일

의무는 줄었지만, 공시는 피할 수 없다: 중소기업과 VSME의 부상

EU가 규제를 완화할수록, 시장은 스스로 더 촘촘한 기준을 만들어낸다.


PwC가 최근 비상장 중소기업을 위한 자발적 ESG 공시 기준인 VSME(Voluntary Sustainability Reporting Standard for SMEs)의 실무 가이드를 공개하면서, 중소기업 ESG 공시 지형에 중요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이 가이드는 단순한 참고 자료가 아니라, 향후 공급망 참여의 실질적 조건을 규정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규제는 후퇴했지만, 시장의 요구는 그대로다

EU는 최근 CSRD(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의 적용 대상을 대폭 축소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그 결과 상당수 중소기업이 법적 공시 의무에서 벗어나게 됐다. 표면적으로 보면 규제 부담이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대기업 공급망에 납품하는 협력사나 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중소기업이라면, 거래 상대방은 여전히 ESG 데이터를 요구하고 있다. 법적 의무가 없다는 사실이 시장의 요구를 상쇄하지는 못한다. 규제의 후퇴가 곧 공시의 면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번 상황의 핵심이다.


2. VSME, 사실상의 표준으로 자리 잡다

이러한 맥락에서 VSME가 중소기업 ESG 공시의 사실상 표준(de facto standard)으로 부상하고 있다. EU가 '가치사슬 상한선' 규정을 도입해, 직원 1,000명 이하 기업에 요구할 수 있는 정보의 범위를 VSME 기준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VSME를 공급망 참여의 준거 기준으로 사실상 공인한 셈이다.

공급망에 참여하려는 중소기업으로서는, VSME 기준을 충족하는 것이 협상력을 유지하는 최소 요건이 될 가능성이 크다. 자발적 기준이지만, 거래 관계 속에서는 사실상 필수 조건으로 작동한다.


3. ESRS 대비 크게 낮아진 공시 부담

VSME의 실질적 장점은 기존 ESRS와의 부담 격차에 있다. ESRS가 314개의 데이터 포인트를 요구하는 데 반해, VSME는 96개 수준에 그친다. 공시 항목이 약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공시 구조는 두 개의 모듈로 구성된다. 기초 모듈은 온실가스 배출(Scope 1·2), 환경, 인력, 반부패 등 11개 항목으로 이루어지며, 의무 감사나 가치사슬 관련 공시는 포함되지 않는다. 심화 모듈은 온실가스 감축 목표, 전환 계획, 가치사슬 내 위반 사례 등 9개 항목을 다룬다. 중소기업이 단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4. 6월 위임법안 이후, 영향력은 더 커진다

현재 VSME는 권고 기준이다. 그러나 오는 6월 위임법안(delegated act)으로 채택될 경우, 협력사에 요구할 수 있는 공식 기준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갖게 된다. 법적 의무 공시는 아니지만, 대기업이 협력사에 VSME 기준의 데이터를 요구하는 근거가 공식화되는 것이다.

CSRD 적용 범위의 변화에 따라 일부 조정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방향성은 분명하다. 공급망 내 ESG 투명성에 대한 요구는 강화되는 추세이며, VSME는 그 요구에 응하는 표준화된 창구가 되어가고 있다.


인사이트

규제 의무의 축소가 ESG 공시의 종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시장은 규제보다 앞서 움직이며, 공급망과 금융 생태계는 이미 VSME를 중소기업 ESG 소통의 공용어로 채택하는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다. 중소기업 경영자라면 '의무가 없으니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보다, '표준이 정해졌으니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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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성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

 

지속가능성은 착한 기업이 하는 일이 아니다. 오래 살아남으려는 기업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요즘 어디서나 들리는 단어다. ESG 보고서, 투자설명회, IR 자료, 기업 홈페이지 첫 화면. 그런데 솔직히 물어보자. 당신의 회사에서 지속가능성은 정말 경영의 언어로 쓰이고 있는가? 아니면 법무팀과 PR팀이 관리하는 문서 속 언어로만 존재하는가?

지금 이 질문에 선뜻 "경영의 언어"라고 답하기 어렵다면, 이 글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지속가능성은 서류 속에 가둬둘 수 없다

많은 기업들이 지속가능성을 두 가지 목적으로만 활용한다. 하나는 규제 대응, 다른 하나는 이해관계자 홍보. EU의 CSRD, 한국의 ESG 공시 의무화, 글로벌 공급망 실사법 등 규제의 압박이 커질수록 기업들은 이에 맞춰 보고서를 만들고 체크리스트를 채운다. 투자자들 앞에서는 ESG 등급을 높이기 위한 전략을 발표하고, 언론에는 탄소중립 선언을 내보낸다.

그러나 이것은 지속가능성의 껍데기다.

진짜 지속가능성은 의사결정의 테이블 위에 있어야 한다. 신사업 진출을 검토할 때, 공급업체를 선정할 때, 새로운 설비에 투자할 때 — 그 순간마다 "이 선택이 10년 후 우리 사업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와야 한다. 지속가능성이 CFO의 스프레드시트와 COO의 운영 회의에 녹아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비용이 드는 홍보 활동에 불과하다.

법적 규제는 최소한의 기준일 뿐이다. 규제를 충족하는 것과 지속가능한 기업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2. 글로벌 대기업만 쳐다보지 말고, 변방의 히든챔피언에게 배워라

지속가능성 사례를 공부할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파타고니아, 유니레버, IKEA를 먼저 떠올린다. 물론 이들에게서 배울 점은 많다. 그러나 이 기업들의 사례는 종종 너무 크고, 너무 자원이 풍부하고, 너무 브랜드 파워가 강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 중견·중소기업이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곳은 **히든챔피언(Hidden Champion)**들이다.

독일의 미텔슈탄트(Mittelstand) 기업들, 북유럽의 가족 경영 제조업체들, 혹은 우리 주변의 눈에 띄지 않는 강소기업들. 이들은 화려한 ESG 보고서 없이도 수십 년간 같은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같은 협력업체와 신뢰 관계를 유지하며, 환경 부하를 줄이는 것이 결국 원가 절감이라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다.

이들의 지속가능성은 생존의 지혜에서 나왔다. 거대한 전략 컨설팅 프로젝트의 산물이 아니라, 오랜 시간 현장에서 쌓인 경험이 만들어낸 것이다. 예를 들어:

  • 폐수를 줄이는 공정 혁신이 수질 규제 준수보다 원가 경쟁력 확보가 목적이었던 소재 기업
  • 지역 농가와 장기 계약을 맺는 것이 조달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시작된 식품 기업
  • 직원 이직률을 낮추기 위한 복지 투자가 결국 숙련 인력 유지라는 핵심 경쟁력이 된 정밀 제조사

이 기업들의 이야기는 화려하지 않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더 배울 것이 많다.


3. 운영 리스크 관리가 지속가능성의 진짜 근육이다: BCP와 보험 프로그램

지속가능성을 진지하게 경영에 내재화하고 있는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있다. 바로 운영 리스크 관리다.

기후변화로 인한 공급망 붕괴, 팬데믹으로 인한 생산 중단, 사이버 공격으로 인한 데이터 마비, 지정학적 갈등으로 인한 원자재 수급 차질 — 이 모든 것들은 이제 "혹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아니라 "언젠가 반드시 일어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 도구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BCP(Business Continuity Plan, 사업 연속성 계획)**는 위기가 닥쳤을 때 사업이 멈추지 않도록 하는 청사진이다. 핵심 공정이 중단됐을 때 대체 루트는 무엇인가? 주요 거점이 기능을 잃었을 때 의사결정 권한은 어떻게 분산되는가? 데이터와 시스템은 어떻게 복구되는가? BCP가 살아있는 문서로 정기적으로 테스트되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의 차이는 위기가 현실이 됐을 때 비로소 극명하게 드러난다.

보험 프로그램은 단순히 사고 발생 후 손실을 보전하는 도구가 아니다. 제대로 설계된 기업 보험 프로그램은 운영 리스크의 지도를 그리는 과정이다. 어떤 리스크를 자체 흡수할 것인가, 어떤 리스크를 전가할 것인가, 어떤 리스크를 줄일 것인가를 명확히 하는 작업이다. 최근에는 기후 관련 물리적 리스크, 공급망 중단 리스크, 사이버 리스크를 포괄하는 보험 상품들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기업들은 투자자와 금융기관으로부터도 더 높은 신뢰를 얻고 있다.

지속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경영자라면, BCP와 보험 프로그램을 "비용 항목"이 아니라 **"사업 생존을 위한 투자"**로 바라봐야 한다.


마치며: 지속가능성은 생존의 문제다

지속가능성은 착한 기업이 하는 일이 아니다. 오래 살아남으려는 기업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서류에서 꺼내 경영의 언어로 만들고, 대기업 사례집을 덮고 가까운 히든챔피언의 현장을 들여다보며, 운영 리스크 관리를 전략의 핵심으로 세워라.

그것이 지속가능성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2026년 3월 21일 토요일

디올, 아르마니, 구찌까지 — '장인 정신'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착취의 실상

8만 원짜리 가방을 380만 원에? 이탈리아 명품업계를 뒤흔든 노동착취 스캔들


전 세계 소비자들이 수백만 원을 지불하며 구매하는 명품 가방. 그 이면에 불법 체류 이주노동자들의 24시간 착취 노동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이탈리아 법원의 판결문을 통해 공식 확인되었다. 디올과 아르마니를 시작으로 구찌, 프라다, 베르사체까지, 이탈리아 명품업계 전반을 강타한 노동착취 스캔들의 전모를 정리한다.

사건의 시작 — 밀라노 법원의 철퇴

2024년 4월, 이탈리아 밀라노 법원은 조르지오 아르마니에 '사법행정 예방 조치'를 내렸다. 공급망 내 하청업체를 제대로 감독하지 않고 노동착취를 방치했다는 혐의였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6월, LVMH 산하 크리스찬 디올의 이탈리아 법인 '매뉴팩처 디올 SRL'이 동일한 조치와 함께 1년간 법정 관리 명령을 받았다. 밀라노 법원이 공개한 34페이지 분량의 판결문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수치로 보는 착취의 실상

디올의 경우, 하청업체가 납품한 가방 한 개의 원가는 53유로, 우리 돈으로 약 8만 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가방은 디올 매장에서 2,600유로, 약 385만 원에 판매되었다. 마진율로 따지면 약 4,800%에 달하는 수치다. 아르마니의 경우는 더욱 충격적이다. 하청업체 노동자가 10시간을 일하고 받은 임금은 고작 2~3유로, 우리 돈으로 3,000~4,000원에 그쳤다. 그 노동으로 완성된 가방은 매장에서 1,800유로, 약 267만 원에 팔려 나갔다. 실질 시급으로 환산하면 300원 수준이다.

공장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법원 판결문과 수사 결과에 따르면, 이들 하청 공장의 실태는 참혹했다. 중국과 필리핀 출신 불법 체류 이주노동자들이 고용되었으며, 24시간 공장 가동을 위해 작업장 인근에는 무허가 기숙사가 세워졌다. 야간과 휴일의 구분이 없었고, 일부 공장에서는 주 90시간에 달하는 근무가 이루어졌다. 생산 속도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기계의 안전장치가 제거되었으며, 수사기관의 CCTV에는 단속을 피해 담을 넘어 도망치는 노동자들의 모습까지 포착되었다. 밀라노 법원은 "착취적인 조건"에서 근무가 이루어졌다고 판결문에 명시했으며, 디올이 공급망 내 노동착취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다고 지적했다.

이탈리아 당국의 반격 — 수사 확대

사건은 디올과 아르마니에서 멈추지 않았다. 2024년 7월, 이탈리아 공정거래위원회(AGCM)는 두 브랜드에 대한 추가 조사에 착수했다. AGCM은 성명을 통해 "노동자를 착취해 제품을 생산해 놓고 장인 정신과 우수한 품질을 홍보한 것은 소비자 기만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2025년 말에 이르러 수사는 더욱 광범위하게 확대되었다. 밀라노 검찰은 구찌, 프라다, 베르사체, 돌체앤가바나, 지방시, 입생로랑, 알렉산더 맥퀸, 페라가모 등 13개 하이엔드 패션 기업 본사를 직접 방문해 지배구조, 내부통제, 공급망 관리 관련 문서 일체를 요구했다.

구조적 문제 —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이번 사건은 일부 악덕 공장만의 일탈이 아니다. 이탈리아 명품 산업 전반에 뿌리내린 구조적 문제다. 대형 브랜드가 단가를 극단적으로 낮게 압박하고 정시 납품을 최우선으로 요구하면, 1차 하청업체는 이 조건을 맞추기 위해 중국계 소규모 공장으로 물량을 넘긴다. 이 2, 3차 하청업체는 이주 노동자를 집단 거주시켜 법정 기준을 크게 초과하는 노동시간과 저임금으로 제품을 생산한다. 공식 계약서에는 브랜드와 1차 하청업자만 존재하고, 실제 생산이 이루어지는 공장은 ESG 보고서와 감사의 완전한 사각지대에 놓인다. 이 구조가 수십 년간 고착화된 것이 이번 스캔들의 본질이다.

브랜드들의 반응

디올은 이탈리아 당국의 조사에 협조하겠으며 불법 관행이 드러난 공급업체와의 협력을 중단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르마니는 당국 조사에 전적으로 협조하겠으나 혐의가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며 조사 후 긍정적인 결과를 확신한다고 발표했다. 두 브랜드 모두 협조와 부인 사이 어딘가에 입장을 두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읽힌다.

이 스캔들이 던지는 질문

'메이드 인 이탈리아'라는 라벨은 오랫동안 전통과 장인 정신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소비자들은 그 라벨을 믿고 수백만 원을 지불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그 라벨이 실제로 무엇을 보증하는지, 그리고 소비자가 지불한 수백만 원이 공급망의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정면으로 묻고 있다. 장인 정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시간당 300원짜리 노동에 기대고 있었다는 사실, 이것이 이번 스캔들이 명품 산업 전체에 남긴 가장 불편한 진실이다.


태그: #명품 #이탈리아 #노동착취 #디올 #아르마니 #구찌 #공급망 #패션스캔들 #소비자알권리 #ESG


2026년 3월 20일 금요일

매출의 0.1%로 세계를 바꾼다: '포인트 원' 이니셔티브와 한국 중소·중견기업의 선택

매출의 0.1%는 작은 숫자처럼 보이지만, 구조화된 금융 레버리지와 만나면 공급망 생존을 결정짓는 전략적 자산이 된다.


1. 새로운 기후금융의 등장

공적개발원조(ODA)가 빠르게 줄어드는 지금, 개발도상국의 에너지 전환을 위한 자금 공백은 구조적 문제로 굳어지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30년까지 연간 2.1조 달러의 재생에너지 투자가 필요하지만, 약 5,000억 달러가 만성적으로 부족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등장한 것이 '포인트 원(Point One)' 이니셔티브다. 중소·중견기업들이 매출의 0.1%를 갹출해 개도국 재생에너지 프로젝트에 직접 투자하는 구조로, 초기 참여 기업 30여 곳이 2030년까지 최소 2억 달러 조성을 목표로 내세웠다.

2. 퍼스트 로스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

이 이니셔티브의 핵심은 '퍼스트 로스(First-loss)' 방식에 있다. 기업 자금이 초기 손실을 먼저 흡수함으로써 기관투자자의 위험 노출을 낮추고, 이를 통해 민간 자본의 유입을 유도하는 구조다. 기본 레버리지는 1.5배이나, 위험 완충이 충분히 확보될 경우 최대 15배까지 민간 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다. 2억 달러의 기업 기여금이 최대 30억 달러 규모의 투자로 전환될 수 있다는 계산이 여기서 나온다. 단순한 기부나 ESG 선언이 아닌, 금융 레버리지를 설계에 내장한 구조라는 점에서 기존 기업 기후 이니셔티브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3. 왜 지금 중소·중견기업인가

포인트 원이 대기업이 아닌 중소·중견기업을 주축으로 설계된 데는 이유가 있다. 글로애플, 구글, 삼성 등 글로벌 공급망을 주도하는 대기업들이 협력사에 재생에너지 사용을 요구하는 기준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소기업 단독으로는 재생에너지 구매 계약이나 직접 투자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현실이다. 매출 기준 비례 기여 방식은 기업 규모에 따라 부담을 조정할 수 있어 참여 장벽을 낮추고, 동시에 공급망 리스크 대응 수단으로도 기능한다.

4. 한국 기업에 주어진 시사점

한국의 중소·중견기업들도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수출 비중이 높은 제조 중견기업일수록 EU 공급망 실사 지침(CSDDD),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해외 규제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놓인다. 재생에너지 사용 이력이 없는 기업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점차 배제될 위험이 현실화되고 있다. 포인트 원과 같은 집합적 기후금융 모델은 단독으로 움직이기 어려운 중소기업들이 공동의 구조 안에서 규제 대응과 투자 기회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경로를 제시한다. 국내에서도 유사한 협력 모델의 설계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할 시점이다.

5. 닫으며

포인트 원은 기후 위기 대응을 자선의 영역에서 금융 구조의 영역으로 옮겨온 시도다. 중소기업의 참여를 단순한 사회적 책임이 아닌 공급망 생존 전략으로 재정의하고, 그 자금을 레버리지의 기반으로 삼는 방식은 앞으로 기업 기후금융의 표준 모델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 기업들이 이 구조를 수동적으로 관망할 것인지, 아니면 선제적으로 참여 경로를 모색할 것인지—그 선택이 수년 내 공급망 내 위상을 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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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14일 토요일

브랜드 신뢰는 공급망에서 무너진다 — 2026 분유 리콜의 해석

글로벌 분유 리콜 사태가 드러낸 것들: 공급망, 신뢰, 그리고 독립성의 가치


2026년 초, 세계 분유 시장에 조용한 충격이 찾아왔다. 네슬레, 다논, 락탈리스 등 수십 년 역사를 지닌 거대 유제품 기업들이 연달아 자사 제품을 자발적으로 회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인은 특정 아라키돈산(ARA) 오일 공급업체로부터 납품받은 원료에서 바실러스 세레우스균이 생성하는 세레울리드(cereulide) 독소가 검출되었기 때문이다. 이 독소는 구토와 설사를 유발하며, 무엇보다 열에 강해 생산 공정 중 살균 처리로도 제거되지 않는다.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식품에서 이런 물질이 발견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태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리콜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번졌다. 네슬레는 37개국 이상에서 영유아용 분유를 자발적으로 회수했고, 다논도 일부 제품의 회수를 발표했다. 유럽을 중심으로 170여 개 분유 제품이 회수 대상에 올랐으며, 피해는 60개국 이상으로 확산되었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해외 직구로 유입된 리콜 제품이 국내 온라인 마켓에서 유통될 수 있다는 경고가 이어졌고, 소비자원은 구매 전 리콜 여부 확인을 당부했다.

왜 이렇게 넓게 퍼졌는가 — 공급망 집중의 함정

이번 사태의 가장 중요한 경영적 교훈은 '어디서 터졌는가'가 아니라 '왜 이렇게 넓게 퍼졌는가'에 있다. 핵심은 단 하나의 글로벌 공급업체가 여러 대형 제조사에 동일한 원료를 납품했다는 구조적 문제다.

현대 식품 산업에서 아라키돈산 오일 같은 특수 기능성 성분은 소수의 전문 공급업체가 글로벌 시장을 과점하는 경우가 많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품질이 검증된 대형 공급업체에 집중하는 것이 비용 효율적이고 관리가 편하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그 논리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공급망이 하나의 노드에 집중될수록, 그 노드의 실패는 산업 전체의 실패가 된다. 네슬레의 문제도, 다논의 문제도, 락탈리스의 문제도 결국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다. 각사가 아무리 자체적인 품질 관리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더라도, 오염된 원료가 들어오는 순간 그 시스템은 무력해진다.

이것이 공급망 리스크의 본질이다. 리스크는 눈에 보이는 자사 공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공급망의 상류에 숨어 있다.

대기업의 품질 관리도 허술해지는 이유

네슬레와 다논은 글로벌 식품 산업에서 품질 관리의 기준점으로 여겨지는 기업들이다. 수백 개의 공장, 수천 명의 품질 관리 인력, ISO 인증과 HACCP 시스템. 이 모든 것을 갖추고도 사태를 막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는 검사의 사각지대 문제다. 기업이 납품받는 원료의 종류는 수십, 수백 가지에 달한다. 각각의 원료에 대해 모든 가능한 오염 물질을 전수 검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검사 항목은 과거의 사고 이력과 규제 기준을 따라 설계되는데, 세레울리드 독소처럼 상대적으로 드문 오염원은 표준 검사 항목에서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는 규모가 만드는 역설이다. 기업이 커질수록 공급망은 복잡해지고, 각 공급업체와의 관계는 계약과 인증서 중심으로 관리된다. 실질적인 현장 검증보다 서류 검토가 중심이 되는 구조에서, 공급업체의 실제 생산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파악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대기업의 품질 관리 시스템은 자사 공정을 정밀하게 관리하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협력사의 내부 문제까지 실시간으로 감지하도록 설계되어 있지는 않다.

세 번째는 비용 압력이다. 품질 관리에 쏟는 자원에는 언제나 기회비용이 따른다.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원가를 줄이고 마진을 지키려는 압력은 공급망 검증의 깊이와 빈도를 갉아먹는다. 이것은 악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인 유인의 결과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 과잉 검증은 낭비처럼 보인다.

HiPP는 왜 살아남았는가 — 독립성의 전략적 가치

이번 사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은 독일 HiPP 분유가 리콜을 피했다는 사실이다. HiPP는 독립적인 공급망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HiPP는 유기농 분유 시장에서 오랫동안 독자적인 원료 조달 철학을 고수해 왔다. 글로벌 공급업체가 아닌, 직접 관리하거나 긴밀하게 협력하는 소수의 전문 농가와 생산자 네트워크를 통해 원료를 수급한다. 단기적으로는 비용이 더 들고, 스케일 확장에도 제약이 생긴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그 선택이 단순한 품질 철학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 전략이었음을 입증했다.

경영학적으로 보면, HiPP의 생존은 '집중화의 효율'과 '분산화의 회복력' 사이의 선택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 글로벌 대기업들은 효율을 위해 집중화된 공급망을 선택했고, HiPP는 회복력을 위해 분산되고 독립적인 공급망을 유지했다. 위기가 없는 시기에는 전자가 우월해 보인다. 그러나 위기가 찾아온 순간, 승자는 후자였다.

이것은 단지 분유 산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반도체, 배터리, 의약품 원료, 식품 첨가물. 글로벌 공급망의 집중화가 가속화된 모든 산업에서 동일한 구조적 취약성이 잠재해 있다.

이 사태가 경영자에게 던지는 질문

이번 분유 리콜 사태는 단순한 식품 안전 사고로 읽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글로벌 공급망 시대의 경영 구조가 가진 근본적 취약성이 표면으로 드러난 사건이다.

"우리 공장에서는 문제가 없다"는 말은 이제 충분하지 않다. 진짜 리스크는 종종 내 공장 밖, 협력사의 협력사 어딘가에 있다. 공급망을 단순히 원가와 납기의 문제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리스크의 지형도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어떤 공급업체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그 공급업체가 무너지면 나는 어디까지 함께 무너지는지를 냉정하게 점검해야 한다.

HiPP의 사례는 '느리고 비싼 길'이 때로는 '가장 현명한 길'임을 보여준다. 단기 효율의 극대화가 장기 생존의 리스크를 높이는 아이러니. 그 아이러니를 직시하는 경영자만이, 다음 위기가 찾아왔을 때 살아남는 기업을 만들 수 있다.


알레오 인사이트


① 공급망 집중은 '효율'이 아니라 '부채'다: 단일 공급업체 의존 구조는 평시에는 원가 절감으로 보이지만, 위기 시에는 기업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시스템 리스크로 돌변한다. 이번 사태에서 네슬레·다논·락탈리스가 동시에 무너진 것은 각사의 품질 관리 실패가 아니라, 동일한 공급망 노드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경영전략적으로 공급망 집중도(Supplier Concentration Risk)는 반드시 정량화하고 한도를 설정해야 할 재무 리스크다.

② 품질 관리 시스템은 '내 공장'만 보고 있다: HACCP, ISO 22000, 자체 품질 감사. 대기업들이 갖춘 시스템은 자사 공정(In-house Process)에 최적화되어 있다. 그러나 오염은 공급망의 상류(Upstream)에서 내려온다. 진정한 리스크 관리는 Tier 1 공급업체를 넘어 Tier 2, Tier 3까지 가시성(Visibility)을 확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 공장은 안전하다'는 말은 이제 절반짜리 답변이다.

③ HiPP의 생존은 '운'이 아니라 '구조'였다: 독립 공급망을 유지한 HiPP가 이번 리콜에서 제외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단기 비용 효율을 포기하고 공급망의 다양성과 독립성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결과다. 리스크 관리론에서 이를 'Resilience over Efficiency(효율보다 회복력)' 전략이라 부른다. 위기가 없는 시기에는 낭비처럼 보이지만, 위기가 오면 생존의 이유가 된다.

④ 브랜드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지만,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영유아 식품 시장에서 브랜드 신뢰는 가장 강력한 진입장벽이자 핵심 자산이다. 네슬레와 다논은 수십 년간 그 신뢰를 쌓아왔다. 그러나 공급망 한 곳의 오염이 그 자산 전체를 위협했다. 무형자산(브랜드)의 리스크 관리는 결국 유형 공급망의 리스크 관리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이번 사태는 다시 한번 증명했다.

⑤ 규제 대응에서 선제적 자발적 리콜로의 패러다임 전환: 네슬레가 규제 당국의 명령 이전에 자발적 리콜을 선택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단기적 비용과 주가 타격을 감수하면서도 선제적으로 움직인 것은, 규제 리스크보다 브랜드 리스크를 더 크게 판단한 전략적 선택이다. 위기 대응에서 '얼마나 빨리 인정하고 움직이느냐'는 사후 평판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다.


[ 결론 ] 이번 사태의 본질은 식품 안전 문제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 시대의 경영 구조가 가진 구조적 취약성의 노출이다. 효율 극대화를 위해 설계된 공급망은 동시에 리스크 전파 속도를 극대화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경영자라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 공급망에서 하나의 노드가 무너지면, 얼마나 많은 것이 함께 무너지는가?"


2026년 3월 6일 금요일

34년을 버텨온 한 문장, "품질은 타협하지 않는다"

황성옥 JS C&I 대표의 성장 스토리를 사유하며


01. 집을 짓는다는 것의 의미

1992년, 황성옥 대표는 '진성실링'이라는 이름의 작은 회사로 시작했다. 당시 건설 업계는 빠른 납기와 저가 경쟁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다른 질문을 품고 있었다.

"우리가 짓는 집에 누군가의 삶이 들어온다. 그 삶을 우리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장공사의 마감 기준을 정하는 방식이었고, 자재를 선택하는 기준이었으며, 30년 넘게 그가 타협하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집 짓는 일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다루는 일입니다. 그 무게를 항상 잊지 않으려 합니다." — 황성옥 JS C&I 대표


02. JS C&I를 성장시킨 세 가지 힘

① 시스템화된 완성도

개인의 감각이 아닌 체계적 기준으로 품질을 관리한다는 것,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JS C&I는 업계 최초로 AI 기반 품질 검사 시스템을 도입해 미세한 결함까지 사전에 식별했다. 또한 '주부의 시선 점검법'이라는 독자적 방식으로 전문가가 놓치는 생활 불편 요소를 실거주자 관점에서 체크했다. 콘센트 위치, 문 개폐 동선, 벽지 이음새 같은 디테일이 그 대상이었다. 그 결과, 1900세대 현장에서 하자 접수 1건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② 수직 통합의 전략

"좋은 시공의 절반은 자재에서 결정된다." 황 대표는 이 판단을 구조로 옮겼다. 2012년부터 자재 유통을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고, 2014년에는 자회사 한솔데코를 설립해 프리미엄 벽지·바닥재·인조대리석 등 고급 마감재 공급망을 완전히 내재화했다. 항바이러스 벽지(사멸률 99.999%), 미세먼지 85% 차단 방충망, 반려동물 안전 고려 '펫마루'까지 — 기능성 자재 개발로 단순 시공사를 넘어 토털 인테리어 파트너로 인식이 확대됐다.

③ 사람 중심의 조직

"설비와 기술은 바뀌어도, 사람의 철학이 기업을 결정한다." 황 대표는 매월 전 직원이 참여하는 아이디어 제안·토론 문화를 운영해 왔다. 이 제안들은 실제 공정 개선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다수다. 수평적 소통과 상호 존중을 기반으로 한 이 조직 문화는 JS C&I가 30년 넘게 주요 건설사로부터 꾸준히 선택받는 이유 중 하나다.


03. 속도의 시대에 완성도를 고집한 역사

1992년 — 진성실링 창업. 수장공사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하고, 저가 경쟁 대신 책임 기준을 선택했다.

2012년 — 자재 유통 직접 관리 시작. 품질의 시작점을 통제하기 위한 수직 통합의 첫 걸음.

2014년 — 자회사 한솔데코 설립. 프리미엄 마감재 공급망을 완전히 내재화하다.

현재 — AI 기반 하자 분석, 안전관리 문서 자동화, 기능성 자재 개발까지. 시공사에서 토털 인테리어 파트너로 진화 중.


04. 리더십의 특징: 원칙 위의 유연함

황성옥 대표의 리더십은 흔히 '원칙주의'로 읽히지만, 더 정확하게는 원칙 위에서만 유연한 리더십이다. 품질 기준과 약속이라는 불변의 축을 중심으로, 기술·조직·시장 변화에는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해 왔다.

업계 최초 AI 품질 검사 도입도, 주부의 시선으로 현장을 점검하는 방식도, 수평적 아이디어 제안 문화도 — 모두 원칙이라는 토대 위에서 혁신을 실험한 결과다.

"기술 과시가 아니라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표준화.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혁신입니다." — 황성옥 JS C&I 대표

많은 경영자들이 혁신을 말할 때 기존의 것을 부수는 데 집중한다. 황 대표는 반대 방향을 택했다. 지킬 것을 먼저 정하고, 그 안에서 혁신할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혁신은 반드시 현장에서 작동해야 했다.


05. 다른 경영자에게 건네는 세 가지 인사이트

첫째, 기준을 타협하는 순간을 조심하라

단기 성과를 얻고 장기 신뢰를 잃는 거래는 생각보다 훨씬 자주 일어난다. JS C&I가 30년 넘게 선택받는 이유는 탁월함이 아니라 일관성이다. 기준은 어렵기 때문에 가치 있다. 쉬운 기준은 차별화가 아니다.

둘째, 좋은 결과의 원인을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라

좋은 결과의 원인을 추적하다 보면, 반드시 아직 통제하지 못한 무언가가 나온다. 황 대표는 그것이 자재라는 것을 일찍 발견했고, 그것을 내재화하는 것이 다음 단계임을 알았다. 수직 통합은 전략이 아니라 철학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셋째, 빠른 성장과 기억되는 기업을 구분하라

빠른 성장은 기사에 남고, 신뢰와 기준으로 쌓은 기업은 사람의 기억에 남는다. 100년 기업은 후자만이 만들 수 있다. 황 대표가 지키고 싶다고 말한 세 가지 — 사람에 대한 존중, 약속을 지키는 책임감, 현장에서 작동하는 혁신 — 는 모두 기억되는 기업의 언어다.


마치며

34년 전, 황성옥 대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수장공사의 마감 한 줄에서 시작했다. 그 한 줄이 시스템이 되고, 자회사가 되고, AI가 되고, 100년 기업을 향한 비전이 됐다.

경영의 본질은 결국 무엇을 지키겠다고 결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황성옥 대표는 그 결심을 34년 동안 매일 반복했다.

"품질은 타협하지 않는다. 사람의 삶을 짓는다는 마음으로 100년 기업을 만든다."


#품질경영 #사람중심리더십 #수직통합전략 #AI스마트건설 #100년기업 #JSC&I #황성옥


2026년 2월 6일 금요일

그릇 너머를 보는 사람 — 김영목 대표의 성장 이야기

들어가며: 왜 그는 쌀을 팔기 시작했는가

83년 된 도자기 회사가 어느 날 쌀을 출시했다.

외부에서 보면 뜬금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김영목 한국도자기리빙 대표의 말을 듣고 나면, 오히려 이 질문이 떠오른다. "왜 이걸 진작 하지 않았을까?"

"명품 그릇에는 명품 밥이 담겨야 한다."

이 한 문장이 '리한미'의 시작이자, 김영목이라는 경영자를 이해하는 열쇠다.


1. 한국도자기리빙이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① 본질에 대한 집요한 질문

한국도자기리빙은 80년 넘게 그릇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김 대표는 어느 시점부터 불편한 질문 하나를 붙들었다.

"우리는 그릇을 완성했는데, 그 안에 무엇이 담기는지는 왜 신경 쓰지 않았을까?"

리한미는 단순한 신사업이 아니다. 10년간 산지를 탐색하고, 보성 간척지의 미네랄 풍부한 토양을 찾아내고, 3대째 농업을 이어온 보성특수농산과 손을 잡은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단일 품종이 아닌 5종 블렌딩이라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와인과 커피가 그러하듯, 조합으로 풍미를 '설계'한다는 발상이다.

이처럼 한국도자기리빙의 성장 동력은 단순히 좋은 제품이 아니라, "왜?"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 태도에 있다.

② 위기를 현장으로 돌파한 경험

금융위기 당시, 대형 유통사와의 계약이 끊겼다. 보통의 기업이라면 긴축과 관망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 대표는 직접 마트 앞에 나가 판매를 시작했다.

이 경험은 단순한 생존 이야기가 아니다. 고객과 직접 맞닥뜨린 그 현장이, 이후 온라인 전환 성공의 감각적 토대가 되었다. 위기는 그에게 약점이 아니라 시장을 읽는 훈련의 장이었다.

③ 브랜드를 '관계'로 확장하는 전략

그릇은 한 번 사면 오래 쓴다. 교체 주기가 길다. 하지만 쌀은 매달, 매주 산다. 리한미의 출시는 단순한 식재료 진출이 아니라, 브랜드와 고객의 반복적 접점을 만드는 구조적 선택이다. 신뢰를 일회성 구매가 아닌 지속적 관계로 전환하는 전략이다.


2. 김영목 대표 리더십의 세 가지 얼굴

첫째, 예술가이자 전략가

순수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경영학 석사를 밟고, 청주 공장에서 7년간 장인들과 함께 일했다. 이 조합은 흔하지 않다.

감각은 있지만 시스템이 없는 사람은 예술가로 머문다. 시스템은 있지만 감각이 없는 사람은 관리자에 그친다. 김 대표는 예술을 시스템으로, 감각을 상품으로 전환하는 법을 몸으로 익혔다. 리한미의 향(香)·청(淸)·담(淡)이라는 라인업 구성도 이 감각과 전략의 결합에서 나온다.

둘째, '매력경영'이라는 철학

그는 직원들을 '리하니언'이라 부른다. 명칭 하나에 정체성과 자부심을 담은 것이다. 직원들과 직접 요리하고, 생일을 챙기고, 사내 커뮤니티를 운영한다.

"좋은 제품은 결국 좋은 사람이 만든다."

이것은 복지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 문화를 만들고, 문화가 제품의 결을 결정한다는 경영의 인과관계를 그는 믿는다.

셋째, INTEGRITY — 보이지 않는 곳의 원칙

그의 핵심 가치는 **정직함(INTEGRITY)**이다. 기술, 구조, 품질 어느 곳에서도 타협하지 않는다는 원칙. 특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원칙을 지킨다"는 말이 오래 남는다.

리한미가 소용량·진공 포장을 고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장 맛있는 한 끼를 위한 설계. 보이지 않는 디테일이 브랜드의 신뢰를 쌓는다.


3. 다른 경영자들에게 주는 인사이트

"태풍이 불 때 진짜와 가짜가 구분된다"

리빙 시장이 어렵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그런데 김 대표는 이 상황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읽는다. 경기가 좋을 때는 좋은 회사와 그저 그런 회사가 비슷하게 성장한다. 하지만 태풍이 불면,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가 드러난다.

이 통찰이 경영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간단하다.

"지금 우리 회사는 바람이 없어도 서 있을 수 있는가?"

Why? / Why not? / What do I want?

김 대표의 사고 프레임이다. 현상을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묻는 것, 관행에 "왜 안 되는가?"를 묻는 것, 그리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아는 것. 이 세 가지 질문이 그릇 회사를 식문화 기업으로 바꾸었다.

카테고리의 경계를 허무는 용기

"우리는 그릇 회사다"라는 정의를 고집했다면 리한미는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그릇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식탁 전체를 설계하는 회사로 재정의했다. 이 재정의가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

업의 본질을 제품이 아닌 고객의 경험으로 정의하는 순간, 경쟁의 지형이 달라진다.


마치며: 그릇은 결국 철학을 담는다

83년의 역사를 가진 회사가 쌀을 출시했을 때, 세상은 '왜?'라고 물었다.

김영목 대표의 대답은 단순했다. "그릇에 담기는 것까지 우리가 책임지고 싶어서."

그것이 예술가의 감각이든, 장인의 고집이든, 경영자의 전략이든 —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더 나은 한 끼를 위한 집요한 설계.

어쩌면 경영이란, 좋은 그릇을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다. 보이는 곳도 보이지 않는 곳도, 타협 없이 빚어내는 것.


"실패를 감수하지 않으면 혁신도 없다" — 김영목, 한국도자기리빙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