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바벨탑: OEM 시스템의 실존적 위기와 자본의 윤리
우리는 지금 '효율성'이라는 신화가 설계한 정교한 미로 속에서, 가장 원초적인 가치인 '안전'을 미로의 제물로 바친 시대의 목격자가 되었다. 2026년 초 발생한 OEM 수입 생활용품의 대규모 리콜 사태는 단순히 불량 제품의 회수라는 물리적 사건을 넘어, 현대 제조 자본주의가 신봉해온 글로벌 분업화의 윤리적 파산을 선언하고 있다.
재무제표의 숫자는 지울 수 있으나, 소비자의 각인된 불신은 회수 불가능한 부채다.
1. 국경을 넘는 그림자: OEM이라는 이름의 책임 전가
현대 기업 경영에서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은 마법의 지팡이와 같았다. 자산 경량화(Asset-light)를 통해 고정비 리스크를 줄이고, 저렴한 노동력을 찾아 국경을 넘나들며 이윤을 극대화하는 전략은 '스마트한 경영'의 전형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그 지팡이가 사실은 양날의 검이었음을 증명한다.
감시받지 않는 연금술: 설계도는 서울의 고층 빌딩에서 그려지지만, 실제 제품이 빚어지는 곳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타국의 공장이다. 본사의 품질관리(QC) 시스템이 현지의 물리적 공정을 실시간으로 장악하지 못할 때, 그 간극은 '금지 성분 혼입'이라는 치명적인 균열로 화한다.
공급망의 소외: 제조 공정의 핵심인 '세척과 소독'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를 수년간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본사가 제조 현장을 '살아있는 유기체'가 아닌 '숫자로 치환된 데이터'로만 대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관리의 소외이자, 브랜드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도덕적 감수성의 결여다.
2. 자본의 연대기: M&A의 신기루와 지배구조의 공동화(空洞化)
특히 이번 사태가 기업의 매각(M&A)이라는 자본의 축제 직전에 발생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업을 가장 높은 가격에 넘기기 위해 외형 성장에 치중하는 동안, 내면의 근간인 품질 보증 체계는 서서히 부식되고 있었다.
숫자에 가려진 우발 채무: 재무제표상의 영업이익률은 매력적이었을지 모르나, 그 이면에는 '신뢰 자산의 부채'가 쌓이고 있었다. 리콜로 인한 직접적 환불 비용은 장부상 수치에 불과하다. 진정한 손실은 인수 후보자들이 목격한 '통제 불가능한 리스크' 그 자체다.
거버넌스의 형해화: 이사회는 비용 절감의 성과에는 박수를 보냈으나, 그 절감의 과정에서 희생된 안전 장치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지배구조(Governance)가 단기적 엑시트(Exit)의 도구로 전락할 때, 기업은 사회적 흉기로 돌변할 수 있음을 이번 사례는 극명하게 보여준다.
3. 사유의 확장: 신뢰라는 이름의 무거운 닻
브랜드는 소비자에게 건네는 가장 고귀한 서약이다. 매일 아침 우리 가족의 신체에 닿는 생활용품은 단순한 상업적 교환의 대상이 아니라, 기업의 인격과 소비자의 신뢰가 만나는 지점이다.
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으로 녹아 사라진다. (Karl Marx)
마르크스의 통찰처럼, 수십 년간 쌓아 올린 브랜드의 견고한 명성은 단 몇 마이크로그램의 금지 성분과 함께 대기 속으로 흩어졌다. 소비자가 느낀 배신감은 제품의 효능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을 지탱하던 '당연한 안전'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유린당했다는 실존적 경악에 가깝다.
4. 에필로그: 다시, 인간의 얼굴을 한 제조로
이제 기업들은 선택해야 한다. 국경 너머의 공장을 단순한 하청 기지로 볼 것인가, 아니면 브랜드의 운명을 공유하는 혈맹으로 관리할 것인가.
디지털 파놉티콘의 구축: 이제 '서류상 확인'은 무의미하다. IoT와 블록체인을 결합하여 해외 공정의 사소한 화학적 변화까지 본사 대시보드에 실시간으로 기록되는 **'투명한 공급망'**만이 무너진 신뢰를 재건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적 대안이다.
가치 평가의 패러다임 전환: M&A 시장은 이제 영업이익 너머의 '리스크 내성'을 측정해야 한다. 제조 공정의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은 기업은 '잠재적 폐업 후보'로 분류되는 냉혹한 시장 논리가 정착되어야 한다.
지배구조의 성찰: 이사회 내에 제품 안전만을 전담하는 독립적 기구를 두고, 사고 발생 시 경영진에게 무거운 책임을 묻는 지배구조의 혁신이 필요하다.
결국, 기업의 가치는 매각 대금의 숫자가 아니라 그들이 만든 제품이 소비자의 삶을 얼마나 안전하게 수호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번 OEM 리콜 사태는 자본이 잊고 지냈던 이 자명한 진리를 가혹한 방식으로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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